적수공권(赤手空拳)
적수공권(赤手空拳)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0.12.26 2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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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부국장 (천안)

맨몸으로 시작한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의 가장 큰 복은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직장 상사 잘 만나는 것과 집주인 잘 만나는 것 아닐까.

큰 돈 물려받은 것 없이 남의 집 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건물주 만나는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다.

충남 천안에서 2년간의 임대차 계약으로 세를 얻어 장사를 시작한 A씨. 부인과 열심히 일해 어느 정도 돈을 모을 만한 상황이 됐지만, 갑자기 집주인이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점포를 비워달라고 통보한 것이다. 사정을 했으나 돌아온 답은 집세를 2배나 올려달라는 것. 건물이 비어 있을 때 그렇게 너그러워 보이던 집주인은 A씨의 식당이 잘되자 노골적으로 "딸이 장사를 하려고 한다"며 핑계를 대고 가게를 빼앗을 생각을 했다. 이럴 경우 임대차 보호법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집주인이 명도 소송을 하면 세입자는 자신이 투자한 시설비나 권리금 따윈 거의 받지 못한 채 그냥 쫓겨나야 한다. A씨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결국 집세를 2년 만에 50%나 올려주고 재계약을 했다.

충남에 소재한 대기업의 한 자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B씨. 과장을 단 지 9년이 됐지만, 차장 진급은 감감무소식이다. 보통 대기업이나 1차 협력사인 자회사의 과장급은 5년 정도가 지나면 차장으로 승진한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 말고는 업무 능력 면에서나, 적극성, 회사 기여도 등에서 뒤질 것이 없는데 인사 때마다 밀린다. 그러나 그건 혼자 생각이었다. 인사 때마다 고과 평정에서 상급자인 차장과 부장은 항상 B씨에게 그의 경쟁자들보다 낮은 점수를 줬다. 그가 생각한 회사에 대한 자신의 기여도는 자신만의 공상이었다. 뒤늦게 확인한 그의 인사 평정 기록은 적극성과 창의성, 충성도 등 모든 면에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주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의 직속 상사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단점을 지적해 주거나, 장점을 북돋아 주기는커녕 장점은 눈감고, 있지도 않은 단점을 부각시켜 엉터리 인사 고가를 매기기까지 했다. 그는 요즘 회사를 옮겨볼까 고민하며 스트레스 때문에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고 있다.

MBC의 주말 심야 프로그램 '언더커버 보스(Undercover Boss, 위장 취업한 사장님)'가 인기다.

미국의 대기업 CEO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회사 밑바닥 구석을 훑으며 암행(暗行)을 하는 얘긴데 국내 예비 CEO들은 물론 평범한 직장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으며 보고 있다.

TV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변장, 변복까지 하며 자신의 회사에 위장취업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그 과정에서 말단 직원들의 고충도 이해하고, 인사상의 문제점이나 고객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경영시스템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는다. 묵묵히 일하는 하급 직원들을 발굴해 인생역전의 기회도 준다. 그런 면에서 프로그램에 나오는 CEO들은 모두 좋은 직장 상사다.

취업 포털 '사람인'의 조사결과 직장인들은 2010년 한 해의 사자성어로 적수공권(赤手空拳)을, 구직자들은 망양지탄(望洋之歎)을 선정했다. 일을 열심히 해 봤지만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직장인들, 결국 취업을 하지 못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탄식만 하고 있다는 청장년 구직자들.

부디 신년엔 우리 사회의 근간인 직장인·자영업자들이 좋은 집주인, 좋은 직장 상사들을 만나 적수공권을 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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