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마을
시가 있는 마을
  • 도종환 기자
  • 승인 2006.05.15 2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중에서

 

<감상노트>

나무가 바람에 겨워 흔들리고, 그 나무에 세든 작은 새들이 소란스러울 산중인데도, 산과 시인은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시인과 산이 서로 하루를, “왜 말 없이 지내시는가?” 무심히 묻듯 바라보는 눈빛이 곱다.

너그러운 자연에 귀의한 시인은, 가끔 호미 씻는 중에도 손에 배인 몇 겹의 세속의 때도 흘려보낼 줄 아는가 보다.

사람의 마을에 산이 그늘을 살포시 덮어주며 노을이 들면, 허물없이 떠나는 것들의 어울림이 고즈넉하다.

저 풍경을 성경(聖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요, 선생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