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선생, 성역화 사업이 필요하다
단재 선생, 성역화 사업이 필요하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11.11 2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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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연지민 교육문화부장

올해는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0주년이다.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선생의 뜻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단재 역사퀴즈를 시작으로 백일장과 기념식, 세미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사실 단재 선생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서슬퍼런 일본에 저항해 민족사학자로, 독립운동가로의 기개를 보여준 선생의 족적은 익히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민족과 국가에 온몸을 받쳤던 선생의 정신과 의지, 그리고 실천가의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단재 선생이지만 우리 고장에서의 기념 사업은 성역화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시민단체로 구성된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주축으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지자체가 지역 인물에 대해 적극적으로 성역화 작업에 나서지 않고 있는 데는 대전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선생은 1880년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8살 때 부친을 여의고 할어버지가 계시는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오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어린 단재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살 때 성균관에 입학해 서울로 상경했다가 다시 귀래리로 돌아와 지역에서 교육사업에 주력했다.

또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으로 일필을 날리다 한일강제병합을 앞두고 안창호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상해정부에서의 활동과 아나키스트로의 독립운동은 역사관에 천착한 선생의 민족정신이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 앞에 물불 가리지 않았던 단재 선생은 1929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돼 여순감옥에 수감되었고, 1936년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이후 유해는 일본의 눈을 피해 먼 중국 땅에서 옮겨와 안장한 곳도 귀래리 마을이다. 먼 길을 돌아와 생의 마지막에 안식처가 된 곳도 바로 귀래리였던 것이다.

충북도와 청원군이 단재 선생의 추모 사업에 미온적인 사이 생가가 있는 대전시의 움직임은 활발하다.

선생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리고, 탄신 130주년을 맞아 대학에선 특별전에, 생가 활용방안에 대해 모색 중이다.

대전시는 대전의 대표적인 인물로 복원시키기 위해 추모 기념사업에 정성을 쏟고 있다. 지자체가 앞장서 예산을 투입하고 성역화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큰 인물이니 추모 사업이 곳곳에서 열리는 것이 이상할 리 없지만, 자칫 단재선생 추모사업이 대전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나타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쥐꼬리만한 지원이나 미온적인 태도로는 귀래리와 단재 선생의 성역화 작업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다. 무엇보다 지자체의 전폭적인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 단재 선생이 지닌 역사성에다 지역의 문화자원과 관광자원 차원에서 좀 더 적극적인 모색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올곧은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는 의미에서 귀래리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고, 대의에 충실한 선생의 실천적 삶은 어린시절을 보낸 귀래리 마을로 천착할 수 있다.

선생이 정신적 뿌리를 내리고, 유해로 돌아와 묻힌 귀래리는 고향, 그 이상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지역에 인물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인물을 조명하고 기리는 사업이 부진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지자체에서는 단재 선생 성역화 사업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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