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을 찾아서<11>
작가의 고향을 찾아서<11>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11.11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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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 (청원)
저항의 언어들로 시의 미학을 남기다

내 노동으로
오늘도 살자고
결심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 시 '내 노동으로' 중에서

저항의 언어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신동문 시인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 시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개성적이며, 저항의 언어로 시를 써 획을 그은 시인이다.

그러나 신동문 시인은 일반 독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65년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절필을 선언하며 시단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준 그의 정신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고 있는 것이다.

신동문 시인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병치레가 잦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몇 차례씩 쉬어가며 다녔다.

1946년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포기하고 신흥대학(현 경희대)의 수영 특기생으로 재입학했으나 늑막염 발병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공군에 입대해 3년간 군 생활을 한다

기상관측병이었던 시인은 연작시 '풍선기(風船期)'를 쓴다.

그리고 제대 후 문학에 매진해 1955년 한국일보에 '봄 강물'로 가작 입선, 동아일보에도 '풍선기'중 한 편이 입선돼 제1회 충북문학상을 수상한다.

1956년에는 '풍선기' 연작시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4.19직후에는 월간지 '새벽'의 주간을 맡아 일했으며, 1962년 '사상계' 편집장과 '창작과 비평' 편집인을 역임했다.

1963년에는 경향신문사 기획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출판 기획자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

이처럼 서울 문단에 알려진 그는 청주에서의 문단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주의 문학모임 푸른문 문학동호회 고문으로 지도하면서 지역의 문학과 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1957년에는 충북문화인총연합회를 창립해 평생지기였던 수필가 민병산씨와 활동했다.

문인으로 출판기획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인은 군사정권에 의해 위기를 맞는다.

1969년 창작과 비평 대표로 있을 때 리영희 교수의 '베트남 전쟁의 비평적 논설'을 게재해 연행되자 "5.16 군사정권에 맞서는 자신의 시도, 자기 자신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시 '바둑과 홍경래'를 끝으로 절필했다.

1975년 단양 애곡리로 내려가 야산을 개간해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학으로 익힌 침술로 인술을 펼치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자리를 유난히 즐겼던 시인은 1993년 담도암으로 타계했고 그의 장기는 유언에 따라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 기증되었다.

불우한 역사 속에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다간 신동문 시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가고 있는 시인을 위해 말년을 보낸 단양과 청주 가경동 발산공원에 시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 신동문(1927.7.20~1993.9.29)은 누구

1927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 문리대를 중퇴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1956)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수정화병에 꽂힌 현대시'(1957), '조건사초(條件史抄)'(1958), '무제(無題)'(1959) 등의 현실의식과 저항적인 경향의 역작을 발표했다.

제1시집 '풍선과 제3포복'(1956)을 간행했으며, 제1회 충북문화상을 받았다.

1965년 군사정권의 민정이양이 실현되지 않자 시 '바둑과 홍경래'를 끝으로 절필했다.

저서로는 시집 '풍선과 제3 포복'(충북문화사 1956)과 신동문 전집(전 2권 솔 2004)에 '내 노동으로'(시집)와 '행동한다 그리고 존재한다'(산문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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