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땅 밟기
봉은사 땅 밟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10.27 2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지난 2007년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샘물교회 신도가 탈레반에 납치되어 2명은 살해되고 다른 21명은 억류 42일 만에 풀려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무고한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납치범들의 행동은 전 세계적 규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치안이 불안정하고 문화적으로 타 종교의 선교에 대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배타적인 곳이라 외교부에서 여행 자제를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선교 활동한 그들의 행동에 대해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올해 7월에 샘물교회 유가족들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는 소식이 있다. 정부가 자원봉사자 23명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국 당시 만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 소송의 이유다. 국민의 반응은 역시 차가웠다.

기독교가 전파된 지 1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늦은 밤 어둠을 밝히는 붉은 십자가가 골목을 메운 것을 보면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인지 아니면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은 민족성을 가졌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1000만을 웃도는 교인을 감안하면 한 집에 한 명꼴로 기독교 신자가 있는 셈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밝아지고 행복한 사회로 변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 들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타 종교에 대한 폄훼 논란 이전에 상업화되어 목 좋은 곳에 높다랗게 솟은 웅장한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신의 음성보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먼저 압도된다. 신문에 끼워 들어오는 교회 홍보 전단과 권리금을 받고 매매되는 교회가 있다는 말은 이미 종교가 가진 역할을 잊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의 비상식적인 행위로 피해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기독교가 가진 본연의 가치인 '사랑과 믿음'이란 그 의미가 퇴색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고난과 역경의 길이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신의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 희생양으로 삼은 신의 무한한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핍박과 압제의 고통 속에서 신의 사랑을 믿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에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해가며 구속받고 고통받는 인류의 빛이 되어 주었다. 인권의 사각지대와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이 되어 십자가를 짐으로 인류 문명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긍정적인 영향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회적 지탄을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봉은사 땅 밟기'라는 동영상이 유포되어 불교 폄훼라는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신의 사랑과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소아병적인 사고에 자신을 가둔 몰지각한 몇 사람의 행동이 기독교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키우고 있다. 불전(佛殿)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는 이러한 행동의 심각성은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있다. 교회의 부흥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 질적으로 굳건한 참된 믿음이 무언인가를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교회를 다니면 금세 천국을 보장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복을 받는다는 근시안적 사고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다. 발을 붙이고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좀 더 폭넓고 다양한 사고와 합리적인 이성에 기초한 탄탄한 믿음을 길러 주어야 한다.

우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물신주의 팽배와 배타적인 닫힌 사고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우상이다. 외식(外飾)하는 자를 꾸짖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기도하는 것을 듣는다는 신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겸손과 포용을 잃고 오만과 불손한 종교로 인식된다면 화평이 아니라 사회적 불신만 증폭할 뿐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