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그녀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10.18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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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정상옥 <수필가>

아침저녁 오가는 길목에 작은 꽃밭이 있다. 누가 심었는지 모르지만 그 꽃밭 안에는 다홍빛 자잘한 꽃송이가 한가득하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긴 목을 한 꽃송이 무리가 바람결에 일렁이는 모습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지만 꽃의 이름을 나는 알지는 못한다. 꽃을 보며 느끼는 감성에 이름이 무엇이든, 누가 가꾸었든 내게 있어 그리 중요치는 않다.

그 꽃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떠오르는 한 여인이 있다. "참 곱다" 느끼면서도 꽃의 이름조차 알려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본 적도 없고 전화기를 통하여 두어 번 목소리를 들은 게 고작이다. 가냘픈 음성만을 기억하는 나의 소견과 상상이 늘 침대에 누워 긴 목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녀와 가을날 길목에서 꽃밭 한 자리를 지키며 길손을 맞는 꽃의 자태가 닮았을 거라 가늠할 뿐이다.

그녀는 두 손과 얼굴만 온전한 중증 장애인이며 우리 회사의 재택근무자로 인연을 맺은 지 십수 년째로 지금은 제품 후가공의 공정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두 손만을 갖고 책임량을 말끔하게 작업하고 받는 급여 날이면 어김없이 감사하다는 전화가 회사로 온다. 몇 번씩이나 감사하다는 말을 곱씹는 그녀의 마음을 전화선을 통해 전해들은 직원들은 물론이고 나 또한 옆에서 괜스레 마음이 뿌듯하며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짙은 향기와 화려한 외모로 이목을 끄는 인공적 기술로 피어난 꽃보다 길모퉁이에서 수수하게 피어난 작달막한 꽃송이 앞에서 세파에 지친 길손의 마음을 위로받듯이…….

작은 일에 감사함을 느끼기까지 그녀가 살아온 삶의 뒤안길 속에는 얼마큼의 고통의 무게가 실려 있을까. 세상은 온통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일등만을 인정하며 재력이나 학력이나 인품 또한 큰 것만을 우러르는 세상이다. 멀리 보기보다는 앞서가려 다투고 서로의 능력을 잣대질하며 비판하는 치열한 오늘과 또 내일의 연속이다나 또한 냉철한 사회의 일원으로 목표를 향해 뛰다가 때때로 허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발목을 묶을 때가 있다. 멀쩡한 사지육신을 갖고도 자족하지 못하고 비관과 자조로 희망을 뭉개버리는 나의 어리석음은 그녀 앞에서 얼마나 큰 사치이고 넘치는 허세였을까. 또 비뚤어진 심성으로 타인의 재물을 노력하지 않고 탐하며 양심에 어긋나는 행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성의 소유자가 사지육신만이 멀쩡하다고 장애인이 아니라고 그녀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는지.

가을햇살이 반사되어 은파처럼 쏟아지는 꽃밭에 작은 꽃송이들이 피어나 한가득하기까지 온전히 맑은 날만 있었을까.

애잔한 모습으로 유유자적하게 가을바람과 햇살을 품에 안고 있지만 그 꽃 한 송이 속에는 살을 에는 동지섣달 찬바람도, 굵고 세찬 소낙비도, 뜨거운 땡볕도 몇몇 날을 담고 있으리라. 아니 그 고난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낙오한 종족의 허실로 이별의 아픔 또한 삭이고 있겠지.

땅속에 씨앗을 품고 혹한의 날들 중에 봄을 기다렸고 가을날에 고운 꽃을 피우리라 희망으로 품고 견디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도 감사하고 감사했으리라. 온갖 탐욕과 시기 질투, 자만과 미련 따위를 혹한의 쓰라린 고통과 무서리 내린 삶의 뒤안길에 묻고 이제는 남겨진 능력에 감사하며 작은 대가를 귀중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그녀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에 감사하며 사는 그녀는 내 상상처럼 다홍빛 작은 꽃송이를 닮았다면 그 마음 또한 참 예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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