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으로 가는 시간
완성으로 가는 시간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10.1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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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박명애 <수필가>

유리창으로 넘어온 햇살이 거실 가득하다. 어린 행운목이 자라는 키 낮은 옹기 안에도 찰랑찰랑, 오래 묵은 라디오 위에도, 작은 아이가 벗어두고 간 스웨터 보풀 위에도 아득하게 쏟아져 내리며 시월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숨 막히게 무더운 날들 뒤로 스며든 짧은 가을날이 마음을 흔든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 본다. 우수에 젖은 기타 연주곡들이 흔들리는 마음을 더욱 고동치게 한다. 감기 탓인지 등이 서늘하다.

햇빛 속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병아리처럼 동그마니 앉아 본다. 내가 일으킨 미세한 공기의 흐름으로 흰 테이블 위에 있는 무언가에서 반짝 빛이 난다. 흰머리 세 가닥. 아침에 머리를 빗다 눈에 거슬려 뽑아놓은 귀밑머리다. 치우는 걸 깜빡 한 게다. 나이는 못 속인다더니 올여름 부쩍 흰머리가 늘었다. 흰머리 염색을 해야 하나 요즘 고민이다. 자연스레 반백의 세월을 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우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잔주름에서 삶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듯 정겹고 편안하다.

사실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탓할 수는 없지만 가끔은 쓸쓸한 생각이 든다. 어떤 개성을 가졌는가가 어떤 상품을 구매했느냐와 동일시되는 요즘 거리에 나서보면 각자의 개성을 온몸으로 치장한 똑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넘쳐난다. 나이 불문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몸마저 상품화 되어버린 풍경 속에서 자연그대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을 만나면 눈이 맑아지는 듯하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흰머리를 집어 들고는 유리창에 대고 반백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 역시도 그런 획일적 개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아마도 어느 순간 미장원에 앉아 흰머리에 물을 들이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저녁마다 눈가에 주름크림을 바르면서도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몸살을 앓을 것이다.

눈 뜨면 새 잎이 피고, 새 꽃잎이 열리던 베란다. 그 격렬하고 관능적인 여름으로 뜨겁던 작은 정원에도 가을이 스며들었나 보다. 은방울꽃 잎새 누렇게 진 지 오래고 말랑하던 선인장 가시들이 짙은 갈색으로 단단해지고 있다. 묵은 잎들을 정리하려니 잔치 끝난 뒤처럼 제정신이 들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참 열심히 달려왔다. 스물 네 시간이 내게만 주어진 듯 빼곡하게 살아온 날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런 물음들이 슬펐고 그 답을 구하고 싶어 치열하게 사느라 세상의 빛깔을 제대로 볼 틈도 없었지 싶다.

매 순간 참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다는 것을 시월이면 깨닫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도 엷어지는 것 같다. 그로 인해 마음이 아프지도 않다. 욕심과 아집으로 가려졌던 세상이 비로소 하나씩 제 빛깔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쉰을 바라본다는 것은 노란 것은 노란빛깔대로, 붉은 것은 붉은 대로 부패한 것은 부패한 빛깔로 보이기 시작하는 시간인가 보다. 어떤 시인은 마흔과 쉰 사이를 완성의 시간이라고 한다. 친구의 말처럼 삶에 있어 완성이란 언어로만 존재하는 꿈이므로 완성을 향해 가는 시간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시월은 변화고, 완성을 향해 가는 시간이다. 가을의 변화는 늘 내게 인생의 위기이며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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