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8>
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8>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09.23 2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색 (청주 주성동)

유배로 청주와 인연…천년 구름 흘러도 뜻 오롯이

고려시대 대표 사상가·교육가 명성
'윤이와 초이 사건' 으로 청주 유배
중앙공원 압각수와 특별한 일화도


昨過永明寺(작과영명사)
暫登浮碧樓(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성공월일편)
麟馬去不返(인마거불반)
石老雲千秋(석노운천추)
天孫何處遊(천손하처유)
長嘯倚風 (장소의풍등)
山靑江自流(산청강자류)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 년의 구름 흐르네.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돌다리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라니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 시 부벽루 전문

이 작품은 고려 말의 문신이었던 목은 이색이 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다가 지은 시이다. 그 옛날 찬연했던 고구려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고, 다만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퇴색한 자취만이 남아 있는 데서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다.

묘하게도 이 시는 목은 선생이 살았던 당시 상황과 비슷하다. 고려말 패망의 길에 접어든 고려 왕조와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게 되는 조선의 이성계. 그 사이에서 혼란의 시대를 거쳐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경북 영덕군 영해에서 태어난 목은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뛰어난 문장과 시로 명성을 떨쳤다. 원나라에서 공직생활을 할 정도로 당시를 풍미했던 그가 청주와 인연을 맺은 곳은 다름 아닌 청주옥사이다.

공양왕 때 '윤이와 초이의 사건'으로 모함을 당한 목은은 1390년 청주 옥사로 유배된다. 목은이 감옥 생활을 하던 중 청주에 큰 홍수가 나면서 옥사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병사의 도움으로 감옥 문은 열렸지만 넘쳐나는 물로 목숨 부지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인근에 있던 큰 은행나무에 올라가 화를 면했고,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하늘이 그의 결백을 증명한 것이라며 석방시켰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나오는 은행나무가 바로 중앙공원 압각수이다. 비록 나무지만 한 생명을 구한 압각수는 600년이 지난 지금도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특별한 나무와의 인연으로 명예까지 회복한 목은은 또다시 조선왕조 개국에 시련을 맞는다. 부패한 고려왕조의 개혁을 꿈꾸었지만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면서 서서히 개혁을 추진하자는 온건 개혁파였던 것이다. 이성계와의 뜻이 맞지 않자 이색은 관직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뛰어난 학문으로 흠모하는 이 또한 많아지자 이성계는 여러번 유배를 보내 힘을 약화시켰다.

목은 선생의 체취는 전국 곳곳에 남아있다. 청주 주성동 목은 영당에도 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학문을 좇는 이들의 발길이 주성강당에 모아졌다. 선생의 시 '부벽루'처럼 천년 구름은, 산은, 강은 절로 흘러 흘러가는 것임을 그곳에서 본다.

◇ 이색은

목은 이색은 고려말의 문신, 학자이고, 고려말에 한산군에 책봉돼 우왕의 사부가 됐으나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아 유배의 생활을 했다. 청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조선 이후 후손들이 청주 주성동에 세거하면서 숙종 때 목은영당을 세워 영정을 모셨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한 이색은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로는 '목은문고', '목은시고'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