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노래하며 꽃피운 항일정신
감자꽃 노래하며 꽃피운 항일정신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08.19 2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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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응(충북 충주)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 전문

뜨거운 여름 햇볕을 받으며 피는 감자꽃을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시가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이다.

쉽고 간략하면서도 당시 일제강점기란 시대성과 민족성을 잘 드러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암울하고 억압된 현실에 저항하면서도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들려주고자 했던 시인의 마음은 시를 곱씹을수록 새록새록 살아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충주 칠금동이 고향이다.

탄금대 가기 전 칠금동 큰길가에 그의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보인다.

그 나무 앞에 있는 밭이 시인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얼마 전까지 남아 있던 집도 헐리고 이제 빈 자리만 시인의 유년을 기억하고 있다.

남한강 물줄기가 흐르는 샛강에서 자란 그는 14살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시인은 충주 교현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2년 제일 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잠시 고향을 떠나게 된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입성한 시인은 민족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일본치하라는 비극적 현실과 반인륜적 삶에 저항으로 맞선 시인은 민족의식으로 무장한다.

하지만 저항의 이름 뒤에는 순탄치 않았던 삶도 녹아 있다.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시인은 1938년 독서회 사건으로 치안유지법에 걸려서 일본에 체포된다.

그리고 내란음모 예비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등을 죄목으로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0년 옥살이로 생긴 폐결핵이 심해지면서 보석으로 풀려난 시인은 1944년 12년 만에 다시 고향인 칠금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비록 병든 몸으로의 귀환이었지만 일본의 식민지 체제는 시인의 정신마저 앗아가진 못했다.

그는 아픈 몸으로 고향 사람들에게 야학으로 세상에 눈을 뜨게 했고, 이 땅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위해 동시를 썼다.

이렇게 탄생한 '감자꽃'은 시인의 정신이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시였던 것이다.

서른 넷이란 짧은 생을 마친 시인은 고향 팽고리산에 묻혔다.

평범한 묘소는 농부의 아들로 살다간 그의 삶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시인의 집앞에서 마주보이는 탄금대에는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시비가 1968년 세워졌다.

방정환 선생과 새싹회가 세운 이 시비는 훼손돼 재건립했다. 시비 앞에서는 매년 권태응문학제가 열린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충주지부가 주관하는 권태응문학제는 권태응 선생 묘소와 생가, 감자꽃 노래비 등을 둘러보는 문학기행과 권태응 시인 자료와 사진 전시 등으로 시인을 추모하고 있다.

권태응은 누구

△1918년 충북 충주 출생, 제일 고보 졸업.

△1937년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 입학.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 와세대다 중퇴.

△1940년 폐결핵으로 출감, 귀국.

△1941년 인천적십자 요양원에 입원.

△1944년 결혼과 동시에 퇴원.

△1948년 글벗집에서 동시집 동요집 '감자꽃'(창작과비평사

1995)을 다시 펴냄.

△1951년 병세가 악화되어 34세의 나이로 돌아가심.

△'땅감나무', '산샘물', '서울 구경' 등 소박한 생활 풍경이 담긴

동시들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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