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4>
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4>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08.06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무영 (충북 음성)
농민문학의 선구자 구수한 흙냄새 물씬

오리골 생가터에 어린시절 흔적 고스란히

기념비·동상 등 보존… 사진으로 체취 느껴

청주 시내에서 충주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어느 곳에서나 쉽게 대지의 운치를 접할 수 있다.

초원처럼 펼쳐져 있는 논과 밭의 싱그러운 색상은 8월의 뙤약볕도 잠시 잊게 해준다.

오랜 세월 땅을 토대로 살아온 민족이어선지, 현대인들에게 다가오는 농촌의 풍경은 여전히 푸근하다

그 길을 따라 40여분 거리에는 농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작가 이무영을 만날 수 있다.

농촌 현실을 소설로 그려내며 흙의 작가로 입지를 세운 소설가 이무영은 음성군 음성읍 오리골이 고향이다.

큰길에서 벗어나 있는 오리골은 이름부터가 왠지 깊은 산골짝이 일 거란 생각을 들게 한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표지석이 작가의 고향임을 알리고 있다.

작은 개천을 지나 꼬불퉁한 산길을 오르면 '오리' 정도의 거리에서 마을이 끝난다.

길 끄트머리에 산에 기댄채 사면을 다져 지은 흙벽집이 나오고, 그 옆으로 이무영 작가의 생가터가 나온다.

철제문 너머로 주인 없는 마당에는 하얀 개망초꽃이 피어 있다.

사이 사이로 작가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기념비, 이무영의 동상, 팔각정자가 덩그마니 남아 증명서처럼 작가의 흔적을 보여 준다.

이무영은 이곳에서 5살까지 살았다. 어린 사내아이가 깡촌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놀았을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재밌다.

무영의 이름을 빌려 지은 무영정자에는 사라진 기억을 모아놓은 듯 사진들이 걸려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흙담집 사진이다. 지금은 헐어 없어졌지만 대문과 이어진 방과 안채가 무영의 어린시절 기억을 담아내고 있다.

반영호 충북문인협회 회장은 "2002년 생가터 정비 전까지 단출한 흙담집이 있어 선생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면서 "군에서는 초라하고 쓰러져 가는 흙담집에 대한 민원제기가 있자, 아예 생가를 없애고 터만 남겨 관리하고 있다"며 사라진 생가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 반 회장은 "이곳은 전쟁시절에도 사람이 사는지 몰랐을 정도로 깊은 산골마을"이라며 "음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무영 선생은 짧은 생활이었지만 땅에 대한 문학적 토양을 키웠던 의미있는 곳"이라며 생가에 대한 가치를 들려줬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자란 이무영은 이후 근거리에 있는 신니면에서 살다 학업을 위해 서울길에 오른다.

17세에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의 문하로 들어가 작가수업을 받았으며, 1929년 장편 '8년간'을 '조선강단'에 연재하면서 필명 '무영'(無影)을 사용해 소설가 이무영의 이름을 알린다

훗날 그의 절친한 문학적 동지인 이흡을 따라 경기도 군포 샛말로 이사해 집필 활동에 몰두, 농촌소설을 출간했다.

1960년 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한국 문단에서 농촌문학가로 우뚝선 이무영은 그의 고향인 음성에서 또 다른 빛을 발하고 있다.

작은 도시지만 지역 문학인들의 활동이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음성에서는 매년 이무영문학제를 개최해 후배 작가들의 토양이 되어주고 있다.

◈ 이무영은 누구

흙의 작가 이무영은 충북 음성이 고향이다.

한국의 농민문학 선구자로 농촌을 제재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지난 1932년 '극예술연구회' 동인과 1933년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으나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그만두고 '조선문학' 주간으로 일했다. 단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60년 4월 21일 뇌일혈로 별세, 서울 도봉산자락 창동의 천주교묘지에 모셔졌다.

음성 설성공원에는 이무영문학비가 있고, 향토문학관에는 작가의 친필원고와 유품 등이 전시돼 작가를 기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