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융조 교수와 떠나는 역사문화탐방 - ⑤
이융조 교수와 떠나는 역사문화탐방 - 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07.20 2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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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조동리 ①

장맛비에 드러난 신석기·청동기 문화

90년 호우로 유물 발견… 발굴서 집터·불땐자리 찾아

붉은간 굽잔토기 등으로 남한강 유역 선사문화 정립

충청타임즈가 주관하고 청주문화원·충청북도·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 함께한 '2010대충청방문의 해' 역사문화탐방이 지난 10일 충주 일원에서 열렸다. '이융조 교수와 떠나는 선사유적' 세 번째 프로그램으로 청동기 사람들의 집터가 발굴된 조동리 선사문화유적박물관을 탐방했다. 집터 10기와 불땐자리, 곡물, 토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연대를 과학적으로 밝힌 중요한 유적지다.

충주 조동리는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다.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이곳은 오래도록 선사인들의 안온한 보금자리였지만, 교통의 발달로 외돌아지면서 한적한 시골 정경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이 새롭게 사람들에게 다가온 것은 여름 장맛비와 관계가 깊다.

지난 1990년 9월 10일 중부지역에 집중 호우가 내리자 만수위 초과로 충주댐이 수문을 전면 개방하면서 하류지역에 침수 사태가 벌어졌다. 논과 밭이 1m 이상 침수되고 유실되면서, 당시 조동리에 거주하던 허태행씨가 자신의 밭에서 토기와 유물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실이 방송에 보도되면서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융조 교수는 "50여 차례 현장을 답사하면서 많은 유물을 발굴했지만 당시 중원군은 예산 문제로 발굴을 미루었다"며 "첫 유물 발견이 된 후 6년이 지난 1996년에서야 첫 발굴에 나섰다"며 당시 상황을 들려줬다. "주변 일대에서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개인 경작지인 관계로 발굴사업에 착수하기 전까지 농사를 지었다"는 이 교수는 "늦은 발굴 작업임에도 3차례 발굴조사에서 집터 10기와 불 땐 자리 53기, 움 13기 등 청동기 사람들의 유적지를 찾아냈다"고 덧붙였다.

이는 구석기인들의 유적과 더불어 강을 중심으로 살아온 선사인들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또 동굴과 강가에서 살았던 것과는 달리 집터 흔적은 공동체 마을을 이루며 산 청동기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교수는 "조동리는 당시 사람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곳으로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대량 출토되었다"며 "그중 민무늬토기와 빗살무늬 토기, 가지무늬 토기, 붉은 간 굽잔토기 등의 발굴로 남한강 유역의 선사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게 됐다"며 유적지로의 의미를 강조했다.

 


많은 유물에도 불구하고 조동리에 박물관이 들어서게 한 유물이 있다. 바로 붉은 간 굽잔토기다. 붉은 간 굽잔토기는 당시 권력층이 제례용으로 사용했던 토기로 우리나라 2지역에서만 출토된 귀중한 유물로, 조동리선사문화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조동리 발굴 현장 앞에 현재의 박물관이 건립하게 됐다.

이 교수는 "조동리 유적은 중원지역에서는 드물게 신석기·청동기시대 문화층이 잘 발달되어 있다"고 말하고 "다양한 유구와 많은 출토 유물상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 이곳에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고 활발한 생산경제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추후 발굴이 계속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동리선사문화유적지는 여름 장맛비가 우리에게 선물한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농부의 손길에 의해 초록빛을 담고 있지만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던 삶터이다. 그들이 사용했던 도구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보여주고 있는 숨결들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 조동리의 보물 '붉은 간 굽잔토기'

참가 학생 탐방후기- 청주여고 1학년 이영주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에는 선사유적 박물관이 있다. 언뜻 보면 다른 박물관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한 보물을 숨기고 있다. 이름은 좀 생소할지 몰라도 '붉은 간 굽잔토기' 가 그 주인공으로 이번 탐방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

'붉은 간 굽잔토기'의 숨긴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이러하다. 1990년 9월 중부지역에 엄청난 비가 내렸다. 충주댐은 만수위 초과로 수문을 개방해야 했고, 그 결과 주변의 논과 밭은 가라앉았다. 그때 허태행이라는 분이 홍수로 헤집어진 자신의 밭에서 상당한 양의 유물들을 발견했고, 이 사실이 방송을 타면서 현장답사가 이뤄졌다. 결국 발굴계획까지 수립되면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1990년 유적이 확인된 후 1996년 제1차 발굴조사까지 흐른 시간 동안에 유물은 참담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그 정도가 얼마였냐 하면 1호 집터를 발견했을땐 눈물이 절로 났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10기의 집터와 53기의 불 땐 자리, 18기의 움, 7기의 도랑, 그리고 돌무지 유구와 웅덩이를 각각 1기씩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주인공이 아직 등장 전이니 말이다. '붉은 간 굽잔토기' 역시 이곳 조동리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다만 그 중요성은 다른 것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말해보자면 '붉은 간 굽잔토기' 는 그 희귀성이 어마어마하다. 일단 다른 토기들보다 제작과정이 어렵고 복잡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지금까지 단 두 곳에서밖엔 출토되지 않았는데 강원도에선 토기가 일부분만 출토된 데 비해 이곳 조동리에서는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간토기란 것은 그저 의례용으로만 해석돼 왔다. 하지만 1호 집터에서 발견되면서 제사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으로 보인 것이다. 조동리 선사유적박물관이 '붉은 간 굽잔토기' 위에 세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대단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 머리에 지식을 쌓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탐방에 참여해 우리 문화와 유적들을 알아보는 것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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