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1>
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1>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0.07.15 2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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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충북 보은)
평범한 시골… 시간을 돌려놓은 듯한 끌림

피반령 고갯길 넘어 중앙리마을… 회인초 3년 다녀

월북작가 해금조치 후 생가복원·매년 문학제 개최

누나야 편지를 쓴다

뜰억에 살구나무 올라갔더니

웃수머리 둥구나무

죄-그맣게 보였다

누나가 타고간 붉은 가마는

둥그나무샅으로 돌아갔지

누나야, 노랗게 익은

살구도 따먹지않고

한나절 그리워했다

- 동시 '편지' 전문

노랗게 잘 익은 살구가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 나무 아래로 누나의 정겨운 눈길도 지나갑니다. 살가운 정경이 담긴 시구에서 시인의 고향이 궁금해집니다.

오장환 시인은 충북 보은군 회인이 고향입니다. 청주에서 출발해 구불텅한 피반령 고갯길을 넘으면 골목마다 가지런히 쌓아올린 돌담이 정겨운 중앙리마을이 나옵니다. 도로 양옆으로 기와집이 즐비한 지극히 평범한 시골이지만 이방인의 시선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끌림의 중심에는 오장환 시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학교처럼 보이는 '오장환 문학관'과 단출하게 복원해 놓은 시인의 생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돌려 놓은 듯한 생가는 쉽게 볼 수 없는 초가이엉과 차곡차곡 돌려 쌓은 돌담, 허술한 삽작문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손님을 맞이하듯 집 앞에는 이철수 판화가의 글씨로 새겨진 시인의 시비 '나의 노래'가 세워져있습니다.

이곳에서 시인은 1918년 태어났습니다. 4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말이 없고 조용했다고 합니다. 생가 뜨락엔 동시에 나오는 살구나무는 없지만 인근에 시인이 3학년까지 다닌 회인초등학교가 있어 유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시골아이로 자라 자연을 오롯이 품은 시인은 이후 경기도로 전학해 안성공립보통학교에서 졸업합니다.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에 들어선 시인은 <시인부락> <낭만>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성벽>과 <헌사>를 발간해 천재라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광복 후 이념의 대립 속에 월북작가로 낙인 찍힌 시인은 건강악화로 195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향에서조차 40여년간 잊힌 인물이 되어버린 시인은 1988년 월북작가 해금조치 이후 다시 한국문단에 오장환이란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폐가로 버려졌던 그의 생가도 복원되었고, 시인의 문학을 조명하는 오장환 문학관도 건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시인을 기리는 '오장환 문학제'가 열려 문인의 고향을 찾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던 '나의 노래'처럼 시인의 글향이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 오장환

충북 보은 출생.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으로 문단에 등단.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따르며 작품 활동 시작. 광복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던 중 월북, 1951년 지병으로 사망.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 시집으로는 성벽(1937년), 헌사(1939년), 병든 서울(1946년),나 사는 곳 (1947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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