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법 위에 있다
윤리는 법 위에 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7.1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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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넘고 싶지 않은 문턱이 있다면 경찰서와 교도소 그리고 재판장이 아닐까 한다. 죄를 짓거나 송사 때문에 한 번쯤 그곳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딱딱한 법조문에 당황하고 억울한 감정의 하소연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법률에 사람이 질려버리고 만다. 법정에서 자신보다 연세가 지긋한 분에게 이혼 경력을 문제 삼아 반말과 막말로 모욕감을 준 판사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권위주의(權威主義)는 권위를 갖는 것이나 권위 그 자체에 의혹을 갖거나 혹은 반항하는 것은 모독이며 죄악이라고 하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 양식을 말한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의 우위를 가졌다는 선민의식에서 발현한 사고다. 젊은 나이에 명석한 두뇌와 사회적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판사라는 지위가 그런 행동을 해도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어 온 오래된 관행 탓이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에는 판사가 재판하는 원칙을 담고 있다. 판사는 헌법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국민의 잘잘못을 가리고 갈등을 해결한다. 그만큼 높은 도덕성과 판단력이 요구된다. 잘못된 판결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도 있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경우도 많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법정신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하는 고독한 직업이다.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공법학자이며 헌법학자인 게오르크 옐리네크(Georg Jellinek)의 '윤리는 법 위에 있다.'라는 말은 법이 가진 냉철함 이전에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 언론에 소개된 상황을 보면 환갑을 얼마 앞둔 분께 "거기 중구난방으로 말하지 말고, 너 이혼했는데 무슨 말을 해"라며 "이혼한 사람은 말하지 마. 이혼했잖아. 말할 권리 없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복을 입었기에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법이 그에게 준 권한이 신성한 것이기에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본질을 망각한 상식 이하의 대화 수준을 가진 판사가 숱한 재판을 하고 판결을 내린다는 사실에 경악할 뿐이다.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면 일반인과 같은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헌법이 규정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대전제이다. 법관은 죄를 심판하는 것이지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때부터 장수한 노인에게 지팡이를 왕이 직접 하사하고 지금도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 대통령이 청려장((靑藜杖)을 선물로 줄 정도로 연장자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이 오랫동안 전통적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인이 아니더라도 법정에 서는 모든 사람의 인권은 그 자체로 보호되고 존중받아야 한다.

육법전서를 달달 외우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허울만을 가지고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현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품위와 인격소양을 위해 인문학적 지식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신뢰를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빵을 훔친 노인에게 법 앞에 예외를 둘 수 없다고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고, 살기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책임이 사회와 자신에게 있다며 그곳에 모인 방청객에게도 50센트의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은 10달러를 꺼내 노인에게 준 미국의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의 명판결이 생각난다. 법정은 법으로 사건을 판결하기 이전에 온갖 억울함을 호소하는 애환의 장이기도 하다. 과중한 업무와 시비를 가르는 갈등이 존재하지만,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헌법적 가치가 실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법의 잣대보다 앞서는 것이 사람에 대한 기본적 도리라는 평범한 진리가 통용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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