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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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4.2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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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교사

책장 주변을 정리하다 예전에 만들었던 졸업 앨범을 찾았다.

한 장짜리 단체 사진만 찍고 앨범은 만들지 않았던 아주 작은 학교였던 그곳에서, 혹여나 아이들이 섭섭해할까 싶어 만들었던, CD로 제작한 졸업 앨범. 그땐 꽤나 괜찮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참 어설프기 그지없다.

뒤늦은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수많은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을 둘러보니 깊게 정들었던 그 아이들과 함께 한 수많은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 중에서 특히 지금까지도 날 웃게 만드는 사건 하나.몇 해 전, 그 때 우리 반은 남자 12명에 여자 5명으로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적은 수였지만 절대 남자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자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웃어넘길 줄 아는 대범함과 포용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 아이들이 우리 반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남자아이가 ‘돼랑이’라는 아이라고 알고 있었다.

170cm가 훌쩍 넘는 큰 키에 커다란 덩치, 그리고 짧게 깎은 머리가 개그맨 강호동과 닮아 ‘돼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 아이. 사실 나도 그 녀석이 살짝 밀면 ‘퉁’하고 튕겨져 나갈 정도였으니, 그 여린 여자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어느 날, 여자 아이들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오정이가 무서워요.”‘오정이’라면 보통 키에 마른 체격으로, 평소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를 잘해서 ‘사오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아이였다.

전교 어린이 회장으로서 가끔 카리스마를 보여주긴 했지만 평소엔 어이없는 말과 엉뚱한 행동으로 주변을 재미있게 해 주던 녀석일 뿐인데 무섭다니?“왜? 오정이가 선생님 몰래 너희들을 때리니?”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5학년 때부터 2년 동안이나 담임을 하면서 지켜보았던 아이들이었다.

모두들 넘어져 다쳐도 괜찮다며 주변을 먼저 안심시켰고, 잘못을 했을 때에는 그것을 선뜻 인정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멋진 아이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친구를 때리는 그런 행동을 할리 없었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 사실은…”아이들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이 장난을 걸면 토닥토닥 받아치면서 같이 노는데 ‘오정이’는 다르다고 했다.

그 아이는 장난을 건 여자 아이를 붙잡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게 한 다음,“이 안에 너 있다.

너, 나 좋아하지? 네가 반할 만큼 나 잘 생겼지?”하면서 짓궂게 나와 장난을 건 여자아이는 물론 교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 말을 하고 난 후, 반 친구들에게 야유를 듣기도 했고, 가끔은 여자 아이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할 말 다하는 녀석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무서웠다기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오정이의 그 유연한(?) 상황 대처 능력이란.그 아이들과 함께 한 2년 동안 별별 일들을 다 겪었지만, 그 일은 나를 가장 크게 웃게 한 사건이었다.

그 아이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처음 봤을 때는 다들 고만고만했는데…. 언제까지나 나에겐 ‘어린 제자’이지만, 만나지 못하는 시간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아이들은 점점 ‘의젓한 어른’으로 되어가고 있겠지.먼 훗날, 별명만큼이나 독특한 빛과 향기로, 마음이 크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때 아이들이 각자 지녔던 자신의 꿈을 이루어, 국제 변호사를 감히 ‘돼랑이’라 부를 수 있고, 큰 회사의 CEO를 ‘오정이’라 부를 수 있는 기쁨을 내게 주었으면 좋겠다.

아 참, 그 아이들이 졸업하기 전에 학교에 묻었던 타임캡슐이 있었는데…….‘얘들아, 그 때 그 약속,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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