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의 함성을 기억하자
6.10 민주항쟁의 함성을 기억하자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6.09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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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도담학원장>

6월은 뜨거운 달이다. 이번 지방 선거를 통해 민심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정권의 오만함에 대해 국민은 투표를 통해 냉엄한 심판을 했다.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면 판을 바꾸는 데 국민은 주저하지 않는다. 정치발전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짐을 국민 자신도 자각할 수 있는 좋은 학습의 기회였다.

오늘이 6.10 민주항쟁 23주년이 되는 날이다. 과거 전두환 정권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이 열망하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하였다. 4.13 호헌 조치 뒤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결의는 더욱더 공고해졌다. 조직된 힘은 곧 민주인사를 중심으로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여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서울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6.10 국민대회는 서울·부산·대구·공주·인천·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거리시위로 발전하였다. 같은 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노태우는 국민의 조직적인 저항을 보고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김대중의 사면복권, 언론 자유, 대학 자율권 지지 등이 포함된 8개 항을 전격적으로 발표하고 이것이 수용되지 않을 시 대통령 후보직 사퇴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전두환 대통령을 압박했다. 그러나 4년 뒤 6.29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고, 노태우는 처음에는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연출'을 맡게 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9선언은 1987년 6월의 위기를 종식했고, 한국의 정치개혁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시위문화는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사무직 근로자들과 일반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정치 참여에 너와 내가 구분될 수 없다는 의식은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에 대해 대항하는 계층이 넓어졌음과 그만큼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이 성숙했음을 반증하는 자료가 된다.

뜨거웠던 6월의 함성이 끝나고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두 양당 지도자의 단일화 실패로 군사정부에 정권을 물려준 뼈아픈 역사적 퇴행이 아쉽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정치에 입문해 각 정당의 소장파를 형성하고 있다. 국민의 저항과 민주주의 열망을 목도한 그들이지만, 기성정치의 구태를 벗지 못한 인사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정치발전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이것은 마치 4.19혁명의 주역들이 정치에 대거 참여했지만, 결국 독재정권의 시녀 노릇과 부정부패의 사슬에 얽매여 몰락했던 과거 역사의 좋은 교훈이 된다.

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 그리고 독재에 항거한 국민의 저항은 멀게는 동학혁명과 4.19혁명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궤를 같이한다. 국민의 참여와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각종 경제 수치가 상승한다고 해서 정부가 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세종시 원안을 백지화하고, 4대 강 살리기라는 명목 아래 생태환경을 난도질해도 국민이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는 현 정부의 교만이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의식의 주춧돌이 된 6월 항쟁은, 잠재되었던 국민의 사회의식을 자각시킨 운동이며, 그것이 동력이 되어 시민운동의 확산과 환경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로 새로운 사회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한 숭고한 가치를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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