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담그는 날
고추장 담그는 날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6.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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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반숭례 <수필가>

수다쟁이 까치는 분주한 내 주위를 맴돌며 아는 척을 합니다.

달력 장에 빨간색 볼펜으로 '고추장 담그는 날' 이라고 2월 달력 장을 넘기면서 3월에 날짜를 정해 놓았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푸성귀가 무성한 계절로 미뤄졌습니다.

어제 저녁 물에 불린 엿 질금을 새벽부터 걸죽하게 걸러내어 솥 안에 부어 넣고 매콤한 연기를 맡으며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폈습니다. 엿 질금 물을 끓일 때는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불씨를 잘 보며 솥 안에 물이 밖으로 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두어 시간 넘게 끓인 엿 질금 물이 졸여지면서 짙은 갈색의 윤기가 돕니다.

아궁이에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장작 한 개피를 얹어 놓고 커피 잔에 물을 부었습니다. 맑은 하늘과 연초록빛으로 짙어가는 계절 상큼한 바람이 편안함을 안겨 줍니다.

장독대 항아리 위에 고양이가 앉아 눈을 껌뻑거립니다. 담장 따라 줄기가 뻗어나간 찔레는 드문드문 꽃을 피우고 하얀 마아가렛 꽃은 한 평 남??정구지 밭가에서 활짝 웃고 있습니다. 커피 잔을 들고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나무 아래 앉아 나는 정적인 여자가 됩니다.

새로움을 만나고, 성숙해 지고, 산다는 것을 다시 인식시켜 주는 자연 앞에 바람은 섬세한 빗질로 푸성귀와 꽃 사이를 가로 지릅니다. 그리고 내 생각들이 모아지고 합쳐져 공감의 실타래를 만들어 내는 이 시간이 참으로 귀하고 귀한 시간입니다.

푸른 나무숲에 숨어 내 모습을 지켜보던 까치들의 재잘거림과 간간이 뻐꾸기 소리도 들려옵니다. 소통은 꼭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고받는 답이 없어도 마음이 통하면 어느 곳에서든 통하게 되는 것을 까치들도 압니다.

뜨거운 엿 질금 물에 메주 가루를 넣고 젓는 동안 간섭하려고 아는 척을 하는 까치들에게 '쉿' 입 다물라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마음 안에 정성을 담아야 고추장의 깊은 감칠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고추장에 들어가는 고춧가루는 내가 농사지은 것입니다. 무 농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았다면 거짓이고, 우리 가족의 먹을거리이기에 남들보다 훨씬 덜 쳤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씻어 가을볕에 말렸습니다.

고추장 간을 맞출 굵은 소금은 김장 때 사서 간수가 빠질 때까지 음달에서 보관을 하고 빈 항아리에 담아 뒀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뭐하러 힘들게 집에서 하느냐고 하지만, 힘들어도 해 놓고 보면 보람도 느끼고 마음이 부자가 됩니다.

이웃들도 내가 고추장을 담그는 줄 모르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나무숲에서 까치 엄마가 푸드덕거립니다. 아마도 고추장 간을 봐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고맙지만 떠들썩한 동적인 여자보단 작게 행동하는 정적인 여자 혼자서도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고 싶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정적인 여자로 잘 사는 법, 내가 나답게 사는 방법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간이 딱 맞고 색깔까지 고운 고추장을 담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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