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립묘지가 있었다
청주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립묘지가 있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5.2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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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충북도교육청 장학사>

5세기 전반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남진정책을 펴게 된다. 이때 고구려에 위협을 느낀 백제는 새로운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 관계를 맺게 된다. 신라 역시 광개토대왕 때부터 군사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던 터라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의 힘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맺은 동맹이 나제동맹이다. 433년 백제 비류왕과 신라의 눌지왕이 처음 손을 잡은 후 백제 성왕이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는 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나제동맹은 처음 목표와는 달리 호시탐탐 한강유역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신라의 계획에 따라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470년에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아 청주지역까지 올라 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4세기 후반 고대 왕국의 전성기를 지나 5세기의 백제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신라를 물리치기 위한 전쟁으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청주시 무심천가에 위치한 신봉동 백제 무덤떼(신봉동 고분군)이다. 현재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는 뒤쪽의 나지막한 산에 분포하고 있으며, 현재 사적 319호로 지정된 백제지역 최대의 무덤유적이다.

당시의 상황을 비추어 보면 아마도 이때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과 관련된 백제의 전사 집단의 공동무덤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지금의 국립묘지와 같은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신봉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널무덤은 300기가 넘으며, 돌방무덤과 화장묘도 10기 이상 조사되었다. 널무덤들은 이곳 산 언덕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돌방무덤은 이보다 약간 늦게 산의 위쪽에 만들어졌다.

출토되는 유물을 보아도 이곳의 무덤들은 다른 지역의 무덤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인다. 쇠 갑옷과 화살촉·칼·창 등 무기류가 다량 출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걸이·재갈 등 군사용 말의 장식품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출토되는 토기류의 경우는 단지·바리·손잡이잔 등 다양하며 초기 백제의 문물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갑옷·철제무기류·뚜껑접시 등은 우리나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고대국가인 가야나 바다 건너 왜의 유물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당시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백제세력이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의 여러 집단은 물론 가야나 바다 건너 왜의 세력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지가 바로 신봉동 고분군인 것이다.

이들은 진천 석장리에서 만든 강력한 철제무기를 가지고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고구려나 신라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백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이곳 신봉동 고분군에서 고이 잠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주말에는 나라 사랑의 뜨거운 열정이 살아 숨 쉬는 최초의 국립묘지 신봉동고분군에서 시대를 초월한 민족애를 느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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