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코 면도기
도루코 면도기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0.02.08 2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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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부국장 <천안>
얼마 전 대형할인점에 들러 면도날을 사려다가 깜짝 놀랐다. 다국적 면도기 회사의 제품들로 꽉 채워진 면도기 코너에서 고른 S사의 4개 들이 면도날 1세트의 값이 무려 1만2900원.

날 1개에 3000원이 넘는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8개 들이 1세트가 그 가격이었는데, '와'하고 한숨소리가 나온다. 그새 두 배나 오르다니. 이건 물가 단속 대상도 아닌 모양이다.

다른 회사의 제품을 봤는데 역시 가격이 비슷했다. 같은 코너의 한 귀퉁이. 유일한 국산제품이 보인다. 가격이 좀 싸기는 한데 마치 곁다리로 '서자'취급을 받듯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구색만 맞추고 있다.

다국적 면도기 회사의 상술이 보통이 아니다. 그들에겐 상술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횡포로 다가온다.

10년 전 질레트가, 쉬크가 뭔지도 잘 몰랐던 한국 시장을 점령하려고 두 회사는 여간 선심을 쓰지 않았다. 면도기 하나 값이 3000원인데 면도날을 4개씩 끼워줬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췄고, 이젠 자사의 면도기에 익숙해진 한국 소비자들에게 배짱으로 장사를 한다. 불과 2년 전에 1개당 1500~2000원에 팔던 면도날을 지금 두 배나 올려 파니 말이다.

소비자들 입장에선 국산을 써 버릴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게 쉽지만은 않다. 이미 '입맛'이 길들여진데다 어떻게 공략했는지 웬만한 슈퍼 진열대에서 국산제품을 보기가 쉽지 않다.

1980년대까지 국내 면도기 시장은 국산 도루코가 독점해왔다. 그러나 1989년 면도기 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 회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질레트와 쉬크가 들어온 게 이때다.

국내 시장에 안주해 있던 도루코는 이후 큰 시련을 겪는다. 시장 개방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이 회사는 1990년대엔 외형의 40%가 줄어들었다. 뒤늦게 R&D 투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늘 뒤차만 탔다. 질레트와 쉬크가 신제품을 출시하면 심혈을 기울여 같은 제품을 내놨지만, 두 회사는 항상 한발씩 시장을 앞서 나갔다.

그러다 절치부심 끝에 3년 전 세계 최초라는 6중 날 신제품을 내놨다. 막대한 연구비가 투자됐음은 물론이고, 언론에 대대적인 홍보도 했다. 질레트가 5중날을 내놓은 게 최신제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5년간 투자한 돈만 150억원이다.

회사 측은 "세계시장에서도 경쟁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보였고 실제 매출도 꽤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 매장에선 보기 드물다. 편의점에 물어봤더니 그 이유가 간단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제품이 아니라서." 소비자 선호도가 뒤떨어져 타사 제품만 갖다 놓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이 제품이 과연 경쟁력이 없는 걸까. 업계에선 기술력에서 외국 회사들과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주 민감한 소비자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지 큰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제품 인지도와 마케팅 능력이었다. 애국심을 등에 업고도 국내 소비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신제품이라니. 시장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안주하다가 뒤늦게 R&D에 뛰어든 오너의 뒷북 경영이 만년 꼴찌의 수모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일찌감치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어 세계 IT시장을 선점해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삼성전자. 끝없는 기술 개발과 도전, 뚝심 있는 마케팅으로 국외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현대차의 오늘이 주는 교훈이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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