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방교회(20)
묵방교회(20)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10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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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청원군 내수읍 묵방리 성공회 묵방교회를 찾은 날은 사순절의 정점인 고난주일이였다.

한 사람의 죄를 다른사람이 대신한다는 대속의 사상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대속의 사상을 중심 교리로 삼고 한 세기를 꿋꿋이 버텨오며 복음을 전파하고, 꾸준히 선교 사역을 감당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한 성공회 대전교구 묵방 성요한세자교회(관할사제 전병세, 프란시스 신부)는 전 교우들의 헌금과 봉사, 신자회장 이철희 교우와 어머니회장 양용순 교우 부부가 봉헌한 300평의 대지 위에 새 성전을 건축했다.

지난 2004년 10월 24일 시설축복으로 시작해 독경대 축복과 제대 축성이 있은 후 대전교구 성직자, 교우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교구장 신현삼 주교 집전, 설교로 새성전 축성식을 가진 묵방교회는 그 감회가 남다르다.

새 성전은 2층으로 1층에 사제관, 사무실 및 기도실, 교육관, 2층은 성전 60평 등 총 120평의 건축물로 구성되었다.

충북 성공회는 진천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기도소를 마련하고 그 지방 유력인사들을 전도하여 자체적으로 성당을 지어 나갔는데, 당시 예수교장로회 묵방교회에 다니던 이상우가 조선성공회 전도사인 송두인의 전도를 받고 귀화·개종해 묵방리성공회를 세워 오늘의 성공회 묵방교회가 되었다.

성공회 묵방교회는 1911년 8월에 창립되었다.

당시 모임을 가질만한 장소가 없어 이요한 교우가 자기집 별채를 기도회와 집회장소로 사용하다가 본동 최경로씨의 집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묵방교회는 한국의 선교역사와 우여곡절, 그리고 아픈 역사를 짊어지고 오늘에 이른다.

1913년 4월 대지 200평과 가옥 5칸, 부속건물 3칸을 매입해 교회당을 확장한 묵방교회 교인들은 산성과 구성리, 신화동, 외평 쇠내 등 이웃 마을을 돌아다니며 전도에 주력해 교인을 늘려 나갔다.

교회내 사설학습소를 설치하고, 신명학원이라 명한 학습소는 40여명의 어린이들을 모집해 한글, 산수, 한문, 음악, 성서를 가르쳤다.

당시 교사로는 차상식씨를 비롯해 이해리, 심상길, 김현대, 정계용, 이상옥, 송옥현 등이 역임했다.

일찍이 당시 9살이었던 아들 이상옥을 데리고 강화(성공회교회)까지 가서 신학 공부를 마쳤던 이요한 교우는 1918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묵방교회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문맹퇴치 일환으로 시작한 신명학원은 개교 후 27년간 많은 지역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교사들의 급여를 지급하던 조선성공회 유지재단의 재정문제로 급여지급이 중단되면서 1930년 3월 30일 부득이 폐쇄하게 되었다.

1936년 5월1일 성당을 개축한 당시 관리자였던 최평준(빠실) 신부의 공사감독으로 1936년 6월 24일 영국인 민재은 신부가 이상우 교우의 세례명인 요한 성당으로 축성했다.

1950년 교회 옆 대지를 매입해 사무실을 건축하고, 69년 4월에는 신도들의 봉헌으로 교회 종각을 건립했다.

교인들의 증가로 예배당 뒤쪽으로 증축공사를 했는데 김종만 신부(디모데)와 신자회장 이동희 교우(애단)의 노고가 컸다.

1976년 3월1일 청주전도구로부터 독립한 성공회 묵방교회는 평소에는 관리자가 월 1회 지방교회를 순회하며 미사를 봉행했으나, 77년 4월 김종만 교우가 배마가 주교로부터 명예사제 신품을 받아 자급사제로 미사를 봉행하게 되었다.

김디모데 신부는 원래 고향이 묵방리로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묵방리로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구의 성직자 부족을 타계하는 일환으로 명예사제로 신품을 받고 3년간 시무하다가 별세했다.

권희연 교우(미카엘)가 빈약한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전도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교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러나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영국에서 선교사들이 파송되지 못하면서 충북지방의 각 성공회 교회는 점점 신자를 잃어가 성직자 없이 평신도나 전도사가 교회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묵방교회도 선교초기부터 70년대 말까지 사실상 이 교회에 상주하는 성직자가 없어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교회를 유지해 오다가 80년 5월에 와서 홍성만 신부가 관할 사제로 부임하였다.

초창기부터 벽촌을 선교 대상지로 삼았던 성공회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산업화 도시화로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힘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교세가 기울어 지금은 작은 교단으로 남았다.

현재 주일날 70여명∼90여명 교인이 모이는 성공회 묵방교회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충북 성공회의 선교역사와 우여곡절로 한 세기를 꿋꿋이 버텨오며 복음을 전파, 꾸준히 선교 사역을 감당해 왔다.

2004년 이곳에 부임한 전병세 신부는 교회 100년의 역사를 앞두고 새 시대,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지역사회와 더불어 복음의 전지기지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은 전 신부는 “말씀과 기도에 목회 비중을 두고 묵방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노인복지사업과 기도훈련원에 대한 비전을 실현시킬 것이다”고 말했다.

/신준수기자lovemunhak@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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