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개발' 옛길도 생명도 역사도 사라져…
'무분별한 개발' 옛길도 생명도 역사도 사라져…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9.1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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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칼럼
김미자 <지구를 살리는 청주여성모임 대표>
한 달에 한 번 우리 가족은 청주지역의 여러 산을 찾아 오른다.

산은 우리 가족에게 다양한 생태뿐만 아니라 산줄기의 흐름, 경관, 문화유적, 이야기, 지명 등을 통해 그야말로 통합적인 학습이 가능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소통하며 보내는 시간이 더 없이 소중하다.

청주의 진산 '우암산'에 이어 상봉재를 거쳐 '상당산'으로, 청주 제일봉이라 일컫는 '선도산'으로 그리고 미테재를 따라 관봉으로 올랐다. 산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김없이 소중한 추억과 배움의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낭성, 보은으로 가던 옛 길 상봉재와 미테재는 참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내 어릴 적 다니던 밤나무골로 넘어가던 그 고개 같기도 하고,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고향 마을이 눈앞에 펼쳐질 것 같아 괜한 설렘을 일게 한다.

아마도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이 다니던 길은 어디를 가나 풍부한 이야기가 있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기에 그런 착각이 드는 것이리라.

고개를 넘으며 우리 가족은 과거를 보러 가던 과객도 돼 보고, 장보고 돌아가는 장꾼도 돼 보았다.

상봉재를 오르면서는 '해월의 애끓는 이야기'에 가슴 저리기도 하였고, 미테재로 가는 길 비선거리에서는 '양수척의 부모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도 됐다.

이렇게 상봉재와 미테재는 과거에는 청주와 다른 지역을 소통시키고, 현재에는 우리 가족을 소통하게 해 주며, 또다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소중한 끈인 셈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 가족이 맞닥뜨린 현실은 처참하게 파헤쳐진 공사현장이었다. 상봉재에 올라 시원한 경관을 기대했던 우리 가족은 '명암저수지~상당산성 간 터널공사'로 철망을 통해 붉은 속살을 드러낸 고개 저쪽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는 발길이 어찌나 무겁던지.

'난 소 팔아 머리끈 사야지, 나는 크레파스, 난 막걸리'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오른 미테재. 재밌는 이야기에 활짝 머금은 미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뿌리째 뽑혀 버린 나무들, 푹 파인 골짜기 그리고 굴착기, 공사차량이 있을 뿐이었다. 이곳 또한 도로 확·포장 공사로 고개 너머 황청리까지 파헤쳐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는 우리 옆으로 지나가던 한 마을 분은 이런 곳에 무슨 도로가 필요하냐며 혀를 내두르셨다.

공사장 인부 한 분도 '전에는 이곳이 좋아 자주 오던 곳인데, 내가 지금 무엇을 하나 보세요. 참, 먹고 살려니까'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셨다.

남아 있는 청주 구간도 언제 공사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소리에 큰아이는 청주시장님께 공사하지 마시라고 얘기할 거라며 속상해 했다.

서낭당에 돌을 쌓으며 우리 가족은 소원을 하나씩 빌었다. 아마도 모두 한결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참 서글픈 현실이다. 겨우 일이 년을 내다보며 쉼 없이 내려온 우리 선조의 숨결과 그곳에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온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게 하다니 답답하다. 지속가능한 또는 지탱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이 개념 또한 개발을 전제로 하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제는 무엇을 남기고 복원해야 할지 개발에서 복원·창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다.

무분별한 개발은 반생태적이며 반역사적인 행위이다. 몇 장의 인기표를 위해 벌린 공사가 두고두고 사람들의 말밥에 오를 것인데 긴 안목을 가지고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큰딸 아이의 소원처럼 보은에서 소 끌고, 장에 팔 물건을 짊어지고 다니던 이 옛길이 꼭 지켜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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