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같은 소년
보석 같은 소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7.0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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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이규정 <소설가>
   어느 사이에 초여름의 날씨가 제법이나 따갑다. 벌써부터 후끈거리고 달아오르는 아스팔트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올랐다. 조금만 움직여도 식은땀이 흐르는 길목을 나선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지만 지난번에 출간한 소설을 보내라는 재촉에 어쩌지 못하고 우체국을 가겠다고 집을 나섰다

우체국이 그다지 멀지는 않다. 하지만 우체국을 다녀오는 길목에도 따가운 햇살에 적잖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우체국을 나서는 길목에 웬 소년이 보도블록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슬그머니 쫓아가서 보았더니, 그 소년은 무릎위에 올려놓은 연습문제지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는 가끔이나마 길거리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았다. 하지만 요즘에 길거리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초여름의 길목에 주저앉아서 공부하는 학생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보석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우연찮게 보았던 그 소년은 초등학교 삼사학년의 학생이었다. 학원 가방을 짊어진 것으로 보아서, 학원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 연습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주저앉았던 모양이다. 괜스런 호기심으로 주춤거리고 훔쳐보았더니, 무릎위에 올려놓은 연습문제에 적잖은 영어단어들이 숨어있었다.

뒤에서 얼핏 보아서도 영어문장을 해석하라는 연습문제였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영어가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또한 초등학생들도 국어처럼 영어문장을 배우는 모양이다. 연습문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년의 이마에는 적잖은 식은땀이 흘렀다. 자기 딴에는 풀어보겠다고 얼마나 골몰하는지, 내가 뒤에서 훔쳐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공부하는 모습이 대견해서 주춤거리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이 자나서야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소년이 힐끔 올려다 보았다. 도적질을 하다가 들켜버린 사람처럼 머쓱해진 얼굴로 싱긋이 웃었더니, 그 소년이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문제를 불쑥 내밀었다.

소년이 그렇게 불쑥 내미는 문제도 적잖은 영어단어가 숨어 있었다. 동그라미 속의 영어문장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영어문장에 기겁하고 놀라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섰다. 괜스레 바쁜 척하고 도망치듯이 내달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뒷모습을 머쓱하게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따가워지는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내달렸다.

내가 그렇게 도망치듯이 내달렸던 것은 영어문장에 자신이 없어서다. 솔직히 영어라면 대문자와 소문자도 헷갈리는 사람이다. 괜스레 풀어주겠다고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헷갈리는 영어문장에 시험공부를 망치기 딱 좋은 실력이다. 그것이 또한 부끄럽고 창피해서 도망치고 말았지만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어느 사이에 반백을 훌쩍 넘기면서 오십대의 중반이다. 초등학생이 풀어달라는 영어문장에 기겁하고 놀라서 도망치고 말았으니, 그동안 내가 그보다 더한 부끄러움에 망신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에도 버스를 기다리면서 공부하는 소년을 보았다는 것은, 모래밭에서 보석을 발견한 것만큼이나 반갑고 가슴 뿌듯해지는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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