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그림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3.05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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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이영창 <수필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열 번이 넘게 이사를 했다. 재산을 키워 이사를 한다면 모르지만, 사정에 의해서 이사를 한다면 그 심사를 이해하리라. 그것은 모두 나이 사십 이전에 이루어 진 일이다. 이것으로 나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불안정했던가 알 수 있다.

원래 살던 집과 이사한 첫째, 두 번째 집은 동남향 집으로 울타리가 없거나 있어도 볕이 잘 드는 집이었다. 겨울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안 깊숙이 볕이 들고 여름에는 아침, 저녁에 잠깐 볕이 들 뿐, 살아가기 아주 좋은 집이었다.

끝으로 이제 영원이라고 도착한 집이 동북향 일반 주택 디귿자형이다. 이에 대여섯 평 정도의 마당이 있다. 하루 한 시간도 안 되게 아침 저녁 슬쩍 햇빛이 든다. 하루 볕드는 시간이 부족한 집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다.

어느 해 봄 막내아들 친구가 치자 화분을 하나 가져왔다. 잎에 윤기가 흐르는 깔끔한 화분이었다. 그 꽃잎도 아름답지만 향기마저 달콤하다. 그 향기는 라일락에 버금간다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눈 가는 꽃나무로 키워 보고자 남다른 손길을 주고는 했다.

그러나 일 년이 넘도록 고이 모신 치자는,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잎에도 차차 노란색 반점이 나타났고 이파리도 하나하나 기를 잃고 떨어졌다. 목숨을 겨우 부지하는 모습이다. 그래서였을까 이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 갔다.

어느 날 치자 화분은 아예 보이지를 않았다. 혹시 다른 곳으로 누가 옮겨 놓았을까 그러나 찾아봐도 없다. 언뜻 아내에게 물었다. 쉽사리 아내는 "볼품없고 다된 나무 같아서 청소하다가 버렸어요." 하고 흘리는 말로 자연스레 대답했다. 양계업자 도태 닭 가려내듯이.

더러 치자가 생각나 자신을 반추해 보았지만, 한때 우리 집을 스쳐간 하나의 꽃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맞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난(蘭)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늘진 우리 집에서도 생명력 넘치는 청초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어느 날 한 문우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그 집 아파트 베란다에는 여러 종류의 난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름답게 꽃핀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난을 기르는 기술이 따로 있는가. 재배기술을 알지도 못하며 난을 여러 해 키워 왔다는 것이 부끄러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난에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문우가 다가와 말했다. '난도 햇빛이 잘 받아야 꽃을 피우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집에 난이 꽃피우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살아간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모든 생물들은 태양의 힘으로 살아간다. 태양을 가로 막은 자 누구이더냐. 나는 난이 꽃피기를 바란다. 나 자신 빛을 소유하고자 남 앞에 그림자 남기는 일은 없었을까. 빛을 향해 떠나자. 빛은 주도세력이다. 주도세력은 그림자 속의 삶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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