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광기(狂氣)의 전주곡
일제고사, 광기(狂氣)의 전주곡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2.19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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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허건행 <충주 주덕고 교사>

어제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폐허만 남고, 오늘 그 폐허 속에서 부끄럼도 모르는 자들이 득세 난무하고 있다. 어제의 광풍은 혹세무민하는 이 정부의 교육정책, 우민화 정책의 중심에 있는 일제고사요, 폐허는 교육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가치가 성적이라는 숫자놀음에 산산조각 난 교육이다.

폐허의 언저리에 낙진이 분분하다. 살아있되 죽은 이들의 비겁과 권력에 빌붙어 보신과 출세의 명약인 기회주의를 먹고 자란 괴물들이 양심의 심장을 토막 내고 칼춤을 추고 있다.

일제고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전국의 학생, 교사, 학부모는 줄 세워졌다. 지역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교육의 주체들은 성적의 결과에 따라 선민이 되고 기민이 되었다. 소우주라 일컬어지는 인간은 로봇이 되어 버렸다. 일제고사결과 속엔 사람은 없었다. 시험 속에서, 시험의 결과 속에서 교육주체들의 정체성, 인권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정권의 마름 노릇을 작정한 사이비 언론과 매스컴은 '직필정론 따위는 관속에나' 식의 태도와 입장으로 입맛에 맞게 교육을 난도질했고 거기에 장단 맞춰 교육청과 관료들은 나발을 불며 망나니 춤을 췄다. 일제고사가 사회에 끼칠 해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토론은 없었다. 오직 상대적 비교의 잣대에서 적대적 경쟁자로서의 비교만이 있었다. 일제고사 발표 이후 지역과 학교에는 서열화의 낙인이 찍힌 깃발만 펄럭인다. 광기의 전주곡은 시작되었다. 부끄럽다. 역설적이지만 부끄럽기 때문에 전국단위 일제고사의 강제시행을 통해 우리사회의 부끄러움에 대해 마주 보아야 한다. 성적이 타 지역보다 뒤쳐져서,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성적이 못해서 부끄러워하는 부끄러움이라면 이는 양심에서 나오는 부끄러움에 대한 모독이다. 현재 일제고사 실시, 그에 따른 성적 공개와 관련된 사회의 반응, 특히 교육 관료와 다수 대중매체의 광분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현 정부가 추구하는 시장화 경쟁 지상 교육의 지향점을 부끄럼 없이 백일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현 정부는 일제고사를 통해 성적이데올로기로 국민을 묶어 버리고 경쟁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를 부끄러움에 대해 성찰할 수 없는 사회로 몰고 있다.

파시즘의 위험한 징후다. 일제고사의 반복적 실시와 공개는 각 주체들의 이기와 맞물려 결과적으로 성적이라는 광기로 사회 전체를 몰아갈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사회는 성적이데올로기에 갇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한경쟁, 광기의 중심에 이미 서 있다. 이번 일제고사 파동을 통해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2월 성적공개라는 미증유의 일제고사 사태 이후 필요한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성찰하는 것이며, 동시에 부끄러움을 걷어내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이다. 2009년 바야흐로 일제고사 전성시대가 막이 올랐다. 3월이다. 멀지 않았다.

"상어가 사람이라면…. 그 커다란 통 속에는 물론 학교도 있겠지. 이 학교에서 물고기들은 상어의 아가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법을 배울 거야…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물고기들의 도덕적 수련일 거야. 그들에게는 물고기 한 마리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놓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과, 그들이 모두 상어의 말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특히 상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겠지. 물고기들은 또한 복종을 익힐 때만 이러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걸 배우게 될 거야…." (베르톨트 브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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