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감은사 ②
경북 경주 감은사 ②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1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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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송부일의 문화재 돋보기
감은사지 3층석탑은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천년이 어제인듯… 하루가 천년인듯…

신문왕, 682년 대종천 앞 건립… 쌍탑가람 최초 배치
경주 3층 석탑중 최대 규모… 문무왕 호국얼 고스란히

송 부 일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682년에 그의 아들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의 뜻으로 감은사를 세웠다.

동해 구에서 대종 천 따라 올라가면 잘 생긴 산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한 절을 지었다. 용이 되신 대왕께서 오셔서 부처님과 함께 나라를 지키던 곳 이다. 그러나 임진란 때 왜병이 아무 이유 없이 불을 놓았다. 이는 우리의 얼, 민족정신을 태워 버린 곳이다.
1996년 동탑 수리때 나온 높이 27cm, 폭 19cm내에 사천왕상이 조각된 보물 제1359호 금동사리 함.

불타버린 감은사에 석탑 2개가 외롭게 서있고 용이 놀던 용담에는 물이 마르고 탑 뒤로 앙상 주추 돌과 주변에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감은사는 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쌍탑 일 금당으로 바뀌는 과정에 동, 서로 두 탑을 세우고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 북 선상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최초의 사지이다.

중문 석탑 남쪽에 금당을 짓고 강당을 석탑의 북쪽 위치에 지었다. 회랑은 남, 동, 서로 금당 좌우는 동, 서 회랑을 연결되는 주회랑이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금당터 앞에 가면 석재 중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보기 드문 석재가 보이는데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있던 것이 아닌 가 생각 된다.

금당 중문 남쪽엔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밖에는 대종 천 따라 들어온 동해 바닷물이 고여 있던 용담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금당 바닥은 이중의 방형대석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루를 깔듯이 초대석을 깔아 장대석 밑이 빈공간이 되게 특수하게 만들었다.

금당 앞에 동, 서로 2개가 서있는 감은사지 3층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 부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 석재로 조립 되었으며 하층 기단은 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 12매로 구성되었으며 갑석 또한 12매로 되어있다.

기단 양쪽에는 우주가 있고 탱주가 3주씩이다. 상층 기단 면석도 12매로 갑석은 8매로 2주의 탱주로 탑신부 1층 몸돌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우고 2층 몸돌은 각 한 쪽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을 1석으로 구성하여 놓았다.

지붕들은 각층의 낙 수면과 정상에 2단의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올라갔다.

3층 지붕에서 시작되는 탑 상륜부에 노반 석 1장이 남아있고 부재가 없으며 약3,9m 높이의 쇠로된 찰주가 노반 석을 관통하여 서있고 석탑의 전체 높이가 13m로 찰주 높이를 빼면 9,1m 신라 제일탑인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59년 발굴조사 시 쌍탑 중 서탑 중앙 사리공에서 창건당시 사리장엄구와 사리가 발견되었다.

금당 밑으로 바닷물이 통하게끔 설계된 경주 감은사지. 사진 위로 보이는 탑이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서탑이다.
사리 장엄구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모양 청동사리공이 정교한 연화문 받침에 57cm 29,5cm 깊이 29,5cm의 함을 놓았으며 함 네모서리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고 좌우에 귀신의 얼굴 고리가 있는 화려함과 섬세한 사리공으로 귀중한 유물이다. 이 사리공은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1996년 4월 동탑 수리 시에는 높이 27cm, 폭 19cm내에 정교하게 조각된 사천왕상의 금동사리 함이 나왔다. 사리함 속의 금동 사리 장치는 높이 13.4cm 폭 14.5cm의 2층 전각 모양의 사리 장치가 나왔다. 서 탑의 사리장치가 거의 같은 2층의 사리장치 연꽃봉우리 모양 탑 속에서 수정 사리병과 사리 55개가 나왔다.

감은사 창건은 문무대왕이 불력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절을 짓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승하 하시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업적과 은혜에 감사 하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이름 짓고 불사 하였다.

죽어 용이 되신 문무대왕이 대왕암에서 대종천 물길 따라 감은사 연못(용담)에서금당과 연결된 음통을 타고 올라와 부처님의 정토아래 불국 세계의 조국번영을 발원하고 머물며 조국을 지킨 대왕의 나라사랑 민족 사랑을 폈던 참선의 도량이다.

감은사의 건축은 신문왕만의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뿐 아니라 전 신라인이 삼국통일의 유업과 태평성세의 편안한 나라를 이룩하신 은혜에 감사한 전 민족적인 감사의 장이였을 것이다.

감은사 용담에 바닷물을 끌어 드린 것으로 생각되는 대종천은 토함산과 함월산에서 발원한다.

1235년 몽고군의 3차 침입으로 4년에 걸쳐서 국토가 유린 되었다.

경주를 불바다로 만들더니 황룡사 구층 목탑을 태워 버렸다. 그리고 선덕왕 신종(에밀레종) 보다 4배나 되는 무게 100톤의 종을 원나라로 가져가려고 하였다. 이 거대한 종을 바다가 아니고는 가져 갈수가 없어 토함산 너머 강물길 대종천을 택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용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고 배가 대종천에서 뜨자 갑자기 폭풍을 일으켜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다.

그 후부터 대종천이라 이름을 붙었다.

지금도 이 곳 사람들은 파도가 거센 날에 바다 속에서 종소리가 울린다한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발굴 조사단이 대종천에 종이 묻혀 있는지 조사를 했지만 발굴 하지 못했다. 이 대종천은 대왕암서부터 바다 물을 끌었다면 이 못은 수로의 관문이며 대왕이 조국을 지킨 관문으로 후세의 우리에게 얼과 조국애를 심어준 교훈의 수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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