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의 현실과 장님의 우화
2008년 12월의 현실과 장님의 우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0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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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오 희 진 <환경생명지키는 교사모임 회장>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첫날 학교에서 헌혈 행사가 있었다.

대한적십자사에서는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줄 혈액을 모으는 이런 기회를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례적으로 마련해 왔다. 헌혈에 기꺼이 참여한 학생들의 이 피는 매우 소중해서 내게는 그들이 곧 만나게 될 바깥 세계에 바치는 보혈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수능시험을 끝으로 어쩌면 이제 더 이상의 시험지옥은 없을 거야라고 믿는 이들이 학교 바깥에 내미는 상징적 희생제의 말이다. 그 응답으로 '너는 자유다.' 하는 바깥의 외침을 비로소 자각하는 순간이 그들의 부활의 통과의례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바깥 세계에 성숙하게 진입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북돋우는 일이 또한 교육임을 알기에 나도 그들처럼 헌혈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미래의 세상 풍경이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되길 기원하며 그 내면의 외침을 따라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가라, 너는 자유다.' 여기까지가 현실의 경계이다.

밖은 그러나 눈앞이 하얗게 되며 온통 식별할 수 없는 '백색 질병'의 세계라고 우화는 가르친다. 그것은 이튿날 학생들과 함께 본 영화에서 감염되어 발길을 내딛는 곳마다 '눈먼 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현실의 우화이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이제껏 보던 것들이 사라지고 하얗게 되어 앞을 볼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지옥의 묵시록이다. 볼 수 없다는 것은 단지 장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님이 되는 순간 마음의 눈도 멀어 이성이 마비되고 폭력과 야만의 세계로 내던져지는 가장 쉬운 통로임을 배우는 것이다. 그중에 압권인 것은 격리시설 제3병동의 '왕'과 그 일당들이 식량을 무기로 여자들을 강간하는 장면이다.

민주주의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와 함께 인간의 영혼까지 쉽게 짓밟힐 수 있음을 웅변하는 이 장면은 거품의 경제에 눈먼 자들이 이룩한 지배의 세계가 지금 강요하는 멍청한 현실의 비극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또한 극복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유는 바로 이 우화 속에서 들리는 마지막 진언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무슨 말인가 다시 교육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이렇게 눈먼 자들은 교육의 성취를 오직 개인의 경쟁과 효율의 시장판 논리로 호도하여 성장기 아이의 교육 생애 내내 시험 성적으로 줄세우기를 강제한다.

더욱 안 된 것은 교육의 기회 균등의 권리를 왜곡하여 공교육체제를 차별적으로 분리하고 학교마저 서열화하여 학벌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최근 학력 저하 운운하며 고입연합고사를 병행 실시하려는 퇴행도 교육을 특권적으로 재편하려는 정치적 치안 논리에 영합하여 거기 배제된 이들을 삶의 게토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산, 지식, 가족 등의 물질의 기반이 취약한 다수의 사람들을 눈먼 자의 지팡이로 이끌어 가는 곳은 어디인가.

이들에게 고통에 찬 삶의 진실을 말하고 그들이 주체로 나서 공적인 문제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눈뜬 자들'은 모욕을 당하고 영혼마저 위협받고 있다.

2008년 12월의 눈먼 자들의 현실은 16세기 피터 브뤼헬의 그림, '장님의 우화'를 극적으로 되살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음의 말씀을 실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복음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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