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내 방
또 다른 내 방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0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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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조 영 의 <수필가>

어쩔 수 없이 버리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그중 하나가 비밀번호 통일이다. 통장이며 컴퓨터를 로그인 할 때 사용하는 숫자는 되도록이면 하나로 통일해야 편하다. 기억이 흐려지면서 숫자 암기가 제일 힘들다.

외우고 있는 핸드폰 번호는 손 꼽을 정도다. 노래방에 가서도 애창곡 번호를 못 외워 찾아야 하고 내 차의 번호를 기억 못하여 차량 홀수제에 걸려 곤란을 겪기도 했다.

물건을 사고 난 후 거스름돈의 암산은 더욱 힘들다. 그래서 가끔은 문명의 이기 때문이라는 말에 위안이 되고 고맙기조차 하다. 내 흐린 기억을 합리화 할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이랴. 적당히 나이를 운운하며 이런 저런 부끄러운 일들을 이해시키고 슬그머니 넘어가면서 사는 일도 나쁘지 않다.

오늘은 서랍을 정리했다.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서랍이다. 책상을 사오던 날, 지금처럼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처음 사귀는 친구처럼 아끼며 정을 주고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했다. 집에 들어오면 맨 먼저 눈길이 갔다.

그곳에 쪼그리고 앉듯 달려 있는 서랍. 여닫을 때마다 향긋한 나무냄새에 취하기도 하고 칸마다 채워 넣는 재미도 있었다. 위, 아래 작고 큰 것에 따라 물건을 분류하고도 남은 서랍 하나. 허전했지만 빈 공간이 있어 더 풍요로웠다.

그러나 조금씩 더러워지고 먼지가 쌓이면서 도타웠던 정도 얇아졌다. 이젠 흠집이 나도 속상하지 않았고 손때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때부터일 것이다.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누가 볼까 숨겨놓은 것을 찾지 못해 모든 서랍을 뒤지는 일이 잦아진 것은.

그럴 때마다 서랍의 좁은 공간을 탓하며 새로운 디자인에 눈길을 돌리고 가구 광고지의 아름다운 색상에 매혹되어 이유 없이 트집을 잡기도 했다. 사람에게서만 권태기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가구가 싫을 때는 넓게 자리잡고 있는 공간만큼 힘겹게 한다. 그래서 서랍이 헐거워질수록 갈망하는 마음은 더욱 목이 마른다.

서랍은 깊고 넓을수록 안전하다. 보면 안 되는 것,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나만 알고 싶은 것을 숨겨놓기에 적당한 곳이다. 잠금장치가 있는 서랍은 더 은밀하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속내가 궁금하다. 서랍이지만 불신을 당하는 것 같아 모욕감을 느낀다. 서랍도 주인을 닮는 법이다. 그 속에 있는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서랍을 닫으며 생각한다. 많은 것을 버린 것 같은데 그대로다. 소중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아직은 내려놓고 싶지 않음이다. 깊고 어두운 곳에 숨겨놓으면 어떠랴. 비밀번호 없이 열리는 서랍이 있는 한 흐릿한 내 기억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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