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읍성 4개문의 이름
청주 읍성 4개문의 이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1.06 22: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 끝에서 나누는 충북의 문화이야기
성안길 천년의 역사를 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청주 지역을 서원(西原)이라 하고 소경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청주 읍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그러한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청주 읍성의 정확한 모습이 알려진 것은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조선 정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 읍성도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읍성의 구조를 보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인데 남문에서 북문으로 큰 길이 직선으로 뚫려있고 동문과 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무심천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가는데 현재의 무심천 위치보다 훨씬 안쪽으로 흘렀다. 청주 읍성은 경주 왕성을 본떠 축성되었으므로 도로망이 그물모양으로 짜여져 있는 등 계획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청주 읍성은 크게 두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즉 중앙공원 일대는 충청 병영이 있던 자리이며 청원군청, 구 청주경찰서는 청주목이 있던 자리인데 그 경계선은 청주우체국을 중심으로 현재 족발골목으로 통하는 길 안쪽이다. 청주목은 청주목사가 집무하던 곳이며 충청 병영은 충청 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곳이다. 문(文)과 무(武)가 머리를 마주하고 청주목을 통치하고 방어했던 것이다. 청주 읍성의 모습은 현재 4대문의 표석을 세워 대략적인 모습 을 일러주고 있다. 4대문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표석 앞면에는 청남문(淸南門 남문), 벽인문(闢寅門 동문), 청추문(淸秋門 서문), 현무문(玄武門 북문)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4대문의 유래를 적었다. 성안길은 지금도 유행의 첨단을 따라가는 패션 거리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1000년 전에도 사람들로 붐비던 길이었습니다. 성안길을 걸으며 천 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tip. 청주읍성의 역사

청주 읍성은 청주 시가지에서 무심천의 동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 신문왕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는 것으로, 신라 신문왕 5년 춘삼월에 서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벼슬의 원태라는 인물을 관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4년 뒤 신문왕 9년 (689)에는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청주 읍성은 고려에서 조선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성안에 우물과 12개의 못이 있었고 관아 건물과 민가들이 조밀하였으며 성밖 동서문 남쪽에도 민가들이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번영하던 청주 읍성의 모습은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망가지고 말았다. 이없게도 일제는 1911∼1914년 사이에 '시가지 개정'을 명목으로 청주 읍성을 헐어 그 돌을 하수구 개축에 사용하였다.

<자료제공 : 충북도교육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