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두개의 얼굴
가을, 두개의 얼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24 2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참교육 칼럼
오 희 진 <환경생명지키는 교사모임 회장>

이 가을에 두개의 얼굴을 본다. 하나는 안개에 지배된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너른 들녘에 펼쳐진 성찰의 자연이다. 먼저 이 가을에 안개는 현실의 거울이다. 한동안 날마다 아침이 되면 안개가 끼어 사람들의 삶을 불편하게 해왔다. 올가을은 안개의 밀도가 우심해져서 현실의 압도적인 부조리함을 일깨우는 표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마치 현실의 장벽처럼 안개 속에서 보이는 것은 하얀 가림막뿐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두려움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 안개는 낮에도 하늘에 뿌옇게 나타나서 낮이 사라져버린 듯한 연무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을가뭄이 극심한 탓에 더러워진 공기가 안개에 입혀지고 늦더위마저 계속되는 형국이다.

오후에는 오염된 온갖 것들이 세상을 비웃듯 배회하는 것이다. 이처럼 황폐한 안개가 세계를 가로막는가 하면 뿌연 연무가 일찌감치 어둠을 내리는 도시의 풍경은 가히 묵시적이다.

아침의 깊숙한 안개를 두고 말하면 먼저 그것은 평소 주변에 낯이 익던 사물들을 사라지게 했다. 그것은 일시에 '너와 나'의 관계를 파탄나게 하고 무화해버리는 위기의 징표이다. 또한 그것은 관계적 삶을 망가뜨리는 것과 별도로 나의 온전한 천연색 삶의 의지를 회칠한 무덤의 삶으로 전락시켜버리는 또 다른 위기의 징표이다.

쉽게 말하면 이 안개의 세계 속에 있는 '나'는 세상에 볼 것이 없게 된다. 안개는 나 이외의 사물들을 감출뿐 아니라 세상을 열어가는 내 눈의 동공을 하얗게 둘러싸서 그 운동을 정지시킨다.

주변뿐 아니라 나도 사라지고 안개의 의지만이 관철된다. 이제 안개는 모든 것의 우상이며 다른 세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안개의 실재 속에서 내가 처절하게 깨닫는 현실 세계의 거울이며 안개의 우화가 전하는 삶의 진리이다.

다음에 이 가을에 너른 들판으로 나가 보라. 낮이 되고 안개가 걷히면 사람들은 으레 맑고 높은 하늘을 칭송하며 천연의 단풍을 찬탄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놀라운 풍경을 보면서도 가슴이 들뜨는 대신 차분하게 제 삶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그 힘은 서늘하게 작용하는 가을의 기운 때문이다.

그 기운의 무차별적 삼투야말로 누구의 삶이라도 가을의 본래 의지에 일치시키며 제 삶의 선선악악을 무겁게 받들게 한다. 이제 조금 더 걸어 사람의 경계를 벗어나 보자. 사람의 터널을 빠져 나와 들녘에 이르면 이미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황금의 벌판이 크게 손짓을 한다.

거기서는 마치 호수의 수면에 이는 물빛이 하늘을 내비치듯 순간 순간 우리에게 제 내면의 본질을 보라 권한다. 그것은 가을의 전설처럼 늘 그렇게 우리에게 어디쯤 서성이는지를 돌아보게 하고 사람 속에서 좁아진 시야를 넓히며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다른 풍요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 두 얼굴의 가을은 정반대의 삶의 지표를 지향하면서 상극하는 세계 즉 지배와 성찰의 삶을 나타낸다. 이 가을에 벌어지는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면 자연의 변화로 이해하고 배우는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탄식하게 된다.

실제로 자본과 권력의 세계에서 그것은 성찰적 삶으로의 균형이라도 바라서 중언부언하는 것이지만 균형은커녕 불균형한 삶의 지배를 더욱 양극화할 뿐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보라. 지배의 가을에 모두 불편해 한다면 성찰의 가을에 다 편안함을 누린다면 어찌 세계의 삶에서도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일어나는 인간의 일에 이 가을의 두 얼굴을 자꾸만 겹치는 일은 거기서 우리가 배우고 육화해야 할 삶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