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다빈치·미켈란젤로 탄생한 도시 피렌체
<149>다빈치·미켈란젤로 탄생한 도시 피렌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2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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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중세와 현대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피렌체의 야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지네브라 데벤치 초상화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르네상스 거장 잉태한 문화·예술 魂 고스란히

레오나르도 - 온유한 성품… 다방면에서 천재성 발휘
미켈란젤로 - 열정적 창작… 다비드상·피에타 등 조각
라이벌이자 동료… 중세 이탈리아 견인한 쌍두마차


레오나르도를 후원하고 총애했던 밀라노의 영주 로도비코는 주변 정세가 악화되고 재정적 곤란을 겪으며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프랑스 루이 12세가 엄청난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오자 군대도 자금도 부족했던 로도비코는 밀라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16년 동안 심혈을 기우려 제작한 거대한 기마상은 프랑스군의 창과 화살에 한낱 흙덩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정복한 프랑스인들이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정사와 향략에만 탐닉하는 것을 보자 실망하여 밀라노를 떠나 고향 피렌체로 17년 만에 귀향하게 되었다.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라는 22세의 젊은이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역동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로 어렵지 않게 그림을 그려내는 스타일로 미술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사에 너무 신중해서 작업이 더딘 레오나르도보다 주어진 일들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미켈란젤로를 사람들은 더 선호했다.

두 사람의 성향도 뚜렷이 달랐다. 레오나르도는 때로는 수학에 골몰하고 때로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차분하고 온유한 성품이었던 까닭에 매순간을 즐겁게 받아들였고 작품이나 행동에서 우아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반면에 매순간 삶의 열정에 휩싸여 살았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삶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부가 위치했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1506년 제작한 모나리자는 나무판 위에 유채 77×53cm 크기로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한 레오나르도와 수제자들의 조각상.

레오나르도는 수도원의 제단화(祭壇畵)를 포기하고 피렌체 사교계의 여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히던 지네브라 데 벤치를 그린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그리고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을 모델로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를 그렸다. 그는 4년이란 시간을 투자해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의 화풍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그림 중 하나이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수리시설을 비롯하여 기계제조와 특이한 구조물들을 설계하거나 발명하여 다방면에 다양한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레오나르도가 다시 롬바르디아를 찾은 해부터 그 다음해까지 아다강 개발에 뛰어들어 320km를 정비하여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롬바르디아 지배자 루이 12세로부터 수리시설에 대한 노고로 충분한 보상을 받기도 했다.

옛 주인인 밀라노 영주 로도비코가 슬픈 생애를 마감한 1510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2년 후 로도비코의 아들 막시밀리안이 밀라노의 새로운 지배자로 입성하는 것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는 여전히 혼돈과 복수와 가난에 신음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1514년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향하였다.

레오나르도와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475년 3월 6일 새벽 4시 피렌체 인근 아버지 로도비코와 어머니 체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실제 성이 시모니카노사였던 그의 가문은 유명한 마틸다 백작부인과 인척관계로 중세 시대에 꽤 유명 했다.

돈은 없었지만 그래도 유서 깊은 카노사 가문이 그들의 선조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미켈란젤로는 전 일생을 통해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그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으며 그 이후로도 그것에 관한 증거는 밝혀진 것이 없었다.

당시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부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은 기를란다요의 작업실에 도제로 보내야 했다. 기를란다요와 맺은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그런데 그 계약조건은 당시 관습과는 달리 도제가 스승에게 수업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에게 24플로린이니 지불한다는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기를란다요는 예술을 향한 미켈란젤로의 열정에 감동해서 옛 대가의 그림 하나를 주면서 모사하도록 했다. 미켈란젤로는 그 그림을 모사한 후에 원화 대신 모사화를 스승에게 돌려주었으나 기를란다요는 그 사실을 눈치체지 못할 만큼 숙달된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십대 이후로 줄곧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예술적 천재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지냈다.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던 로렌초가 목신의 얼굴을 다듬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보게 되고 그의 열정에 감동되어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곁에 두게 되었다. 로렌초는 젊은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를 틈나는 대로 불러서 자신이 평생 수집한 온갖 종류의 예술품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유명세 때문에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마사초의 아름다운 벽화가 있는 카르미네 성당에서 몇 달은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예상대로 타의 추정을 불허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보상은 뜻밖에 증오심을 유발시켰고 친구 토리지아니가 날린 분노의 주먹에 미켈란젤로의 코뼈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질투심 많은 토리지아니는 스페인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으나 그곳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하고 만다.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평생 감출 수 없는 일그러진 훈장을 달고 다녀야 했다. 이 부러진 코는 로마의 콘세르바토리오 박물관에 있는 그의 흉상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장사수완에서는 할아버지 코시모에 미치지 못했지만 로렌초는 군주다운 면모와 미덕에서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모두를 능가했다. 로렌초는 조상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예술을 보호하는 까닭에 그의 영혼은 온갖 유형의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와 문학가들의 화려했던 시절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었다. 로렌초가 겨우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치명적인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위대한 르네상스의 후원자 로렌초 메디치는 1492년 4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스탕달은 이탈리아 미술편력에서 로렌초의 죽음은 세계의 문명을 한 세기나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고 애석해하고 있다.

로렌초의 죽음과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행복도 끝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의 열일곱 되던 해였다. 다음날 그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쓸쓸히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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