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남선사 일체경 전래 루트
<9> 남선사 일체경 전래 루트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10.20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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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고려 초조대장경이 선창사와 남선사 옮겨지기 전 최초 보관됐던 후쿠오카 하코자키구 신사 전경.
中·고려서 수집… 후쿠오카·고베거쳐 교토 이전

日, 14∼15세기 중반까지 대장경 6000권 분량 확보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쓰 命, 선창사남선사 옮겨
남권희 교수 "일체경, 출판강국 발전에 결정적 역할"

교토 남선사(南禪寺·난젠지) 서보전(瑞寶展)에 소장된 일체경은 10세기∼14세기 사이 중국과 한국, 일본의 목판 인쇄 문헌을 갖춘 보고(寶庫)로 평가된다. 중국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원나라판(元版) 대장경,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일본 목판본까지 갖춘 세계적인 '대장경 박물관'이라고 할 수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14세기부터 중국과 고려에서 출판된 대장경을 수집하기 시작해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6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확보했다.

고베 선창사 승려들은 1400년 이전에 일체경을 갖출 만큼의 대장경 수집을 해 부족분은 1429년까지 교토의 여러 사찰에 필사해 내용을 추가했다.

선창사 대장경은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명령으로 남선사로 옮겨졌다.

현재 남선사에 소장된 고려 초조대장경는 고베 선창사로 옮겨지기 이전 후쿠오카현(福岡) 하카타(博多)항 하코자키구(箱崎宮) 신사(神社)에 한동안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하코자키구 신사는 한국과 뱃길이 나있는 하카타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을 잇는 뱃길이 나있어 하카타항은 예나 지금이나 교역 창구 역할을 한다.

선창사 기록에는 승려 경안대사(慶安大師·사미 케이안)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부인사(符仁寺)와 가야산(伽耶山) 해인사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초조대장경을 확보했고, 항구와 인접한 신사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 남선사 기록에 개성 부인사로 표기된 것은 대구 부인사의 오기(吳記)이거나, 고려를 개성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권희 교수(경북대)는 "고려 현종 2년(1011년)∼선종4년(1087년) 사이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은 당초 개성 흥왕사에 봉안됐지만, 고종 19년(1232년) 이전에 대구 팔공산 인근 부인사로 옮겨졌다"며 "이규보의 저서를 보면 수장됐던 초조대장경판이 모두 몽고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신사에 대장경을 보관했던 것은 그 만큼 큰 가치를 부여했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일본 불교계는 하코자키구 신사에 대장경이 있었던 것은 고베 선창사 승려 경안스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불교계는 경안스님을 일체경 조성에 나섰던 선창사 월암선사(月菴禪師)의 제자였던 무견(無見) 화상의 일을 도왔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창사 기록에는 월암선사 제자였던 무견화상이 중국에서 일체경을 모으다 1393년 또는 1407년 사망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경안스님이 1394년 선창사를 위해 불경을 수집했다는 기록과 함께 경안스님이 하코자키구 신사가 있는 하카타에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선창사로 옮겨지기전 고려 초조대장경이 보관됐던 하코자키구 신사는 지금도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명소이다. 923년 창건된 신사 어본전(御本展)과 루문(樓門) 등 상당수 건물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라경준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사는 "일본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인 신사에 대장경을 보관했던 점을 고려하면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며 "이동경로에 대한 연구가 아쉽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는 고려 초조대장경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이 약탈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였다.

그러나 선창사 주지 곤도 도시히로(近藤利弘) 스님은 지난해 11월 고려대장경 연구소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로 개최한 워크숍 발제문 '일체경의 유래'를 통해 수집 경로를 밝혀 이에 수긍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선창사 승려들의 대장경 수집은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이들은 익주(益州)의 성도(成都), 복주(福州)의 동선등각원(東禪等覺院)과 개원사(開元寺), 호주(湖州), 항주(杭州)의 남산보령사(南山普寧寺)에서 출판된 대장경을 수집했다.

중국은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해 황제가 칙명을 내려 불경을 수집해 번역하고, 한자로 출판했다.

현재 남선사가 소장하고있는 일체경 속에있는 '佛本行集經券 十九·불본행집경권십구'는 북송 황제 대종(大宗)이 개보(開寶) 4년(971년) 출판된 것이다.

'開寶藏'이라고 하는 이 불경은 당시 제지와 인쇄 기술이 발달했던 익주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최초의 일체경이다.

송 왕조는 위엄을 내보이고, 국제친선을 도모하기위해 한국과 일본, 캄보디아에 증여하면서 인쇄술이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는 2권이 전래됐는데, 이중 하나를 남선사가 소장하고 있다. 인쇄연대로는 가장 오래된 귀중본이고, 황벽나무 껍질로 만든 염료로 염색한 종이를 사용했다고 한다.

황제의 칙명외에도 권력자나 일반인들이 성금을 모아 불경을 출판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남선사 일체경중 송판(宋版) 동선사(東禪寺) 등각원(等覺院)본과 원판(元版) 보령사(普寧寺)본에는 선조나 부모, 자식 공양을 위해 일반인들이 목판 1권을 파는 비용을 부담하거나, 1권중 몇 장만 비용을 부담했다는 내용이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
(1)익주 (2)개성 부인사 (3)가야산 해인사 (4)복주 (5)호주 (6)항주 (7)하카타 (8)고베 선창사 (9)오사카 (10)동경 남선사 (11)히요코 대명사

중국과 고려에서 선창사로 수집됐던 불경은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쓰 명에 의해 남선사로 옮겨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재편 과정에서 말사(末寺)에 일체경을 보관하다 타종단에 빼앗길 것을 우려했던 승려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허락을 받아 본사(本寺) 남선사로 옮겼다.

승려들은 치밀한 계획을 짜 고베에서 배편을 이용해 교토 도바(鳥羽)까지, 다시 육로를 이용해 남선사로 옮겼다. 선창사 기록에는 일체경을 보내준 대가로 남선사는 불사리탑과 월암선사의 유품을 받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남권희 교수는 "남선사 일체경은 대장경 간행사 연구에 획기적인 지침이 되는 보고"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교토로 옮겨진 이후 활발한 불서 간행과 학문보급, 금속활자주조 등 출판강국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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