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충북 단양 영춘면 온달동굴 <천연기념물 제261호>
21. 충북 단양 영춘면 온달동굴 <천연기념물 제261호>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8.10.17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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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천연기념물 그 천혜의 비상
충북 단양 영춘면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261호 온달동굴 내부.
황금빛 종류석 커튼을 드리운듯…백옥의 석순 지상으로 치솟을듯…


4억5000만년 시간이 빚은 천연의 비경 일품
길이 700m… 일직선으로 뻗은 석회암 동굴


연숙자기자·생태교육연구소 터


온달 장군이 수양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온달동굴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마을에 있다. 연한 회색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고생대 동굴로 1979년 6월 18일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됐다. 자연적인 석회암 종유석들이 기이한 형태를 보여주는 동굴은 총길이 700M로 일직선으로 뻗어있다. 한때 영춘남굴로 불리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온달동굴로 이름을 바꿨다.

자연이 빚은 역사와 인간이 빚은 역사가 하나되어 만나는 곳이 있다. 온달동굴과 온달 산성이다. 성산 기슭 지하에서 약 4억 5,000만년 전부터 생성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 온달동굴은 주굴과 지굴의 길이가 760m인 석회암 천연동굴이다. 그리고 동굴 위에는 1500년 전 사람의 손길로 하나하나 쌓여진 성벽이 시간을 뛰어넘어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두 곳은 모두는 '온달'이란 이름으로 불려지며 역사와 인물이 하나됨을 보여주는 곳이다.

온달동굴로 탐방을 시작하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화제가 됐다. '전설일까, 실제일까'부터 시작해 '고구려냐 신라냐'의 영토문제까지 수려한 단양팔경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온달동굴을 찾았다.

동굴 주변에는 드라마 세트장이 조성되어 관광지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온달의 기상을 품기엔 작아보이는 동상을 지나 500M 안으로 들어가자 동굴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입구에는 비닐우비를 입은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길다랗게 줄을 서잇었다. 그리고 입장에 앞서 안전모를 하나씩 건네 받았다. 동굴로 들어서자 넓직한 통로로 낙수소리와 물흐르는 소리가 겹쳐지며 퉁탕댄다. 동굴의 공명 효과로 폭포 옆을 지나는 느낌이다.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동굴은 주굴과 지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단조로운 통로따라 석순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온달동굴만의 특징을 드러냈다. 둥굴 벽면에는 깨진 종유석에서 다시 자라고 있는 종유석이 보였고, 침식된 흔적도 관찰 할 수 있었다. 또 아기자기한 석순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동굴 바닥에는 지표수가 유입돼 수심 1m 정도의 물이 흐른다. 남한강에서 지하수로를 타고 들어온 물고기와 곤충 등 10여종이 아무것도 살수없을 것같은 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다. 컴컴한 내부로 관찰이 쉽지 않지만 톡톡 튀는 톡톡기와 지네 등 어둠을 좋아하는 생물을 볼 수 있었다.

태고 신비를 간직한 천연의 비경은 그러나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발밑으로 흐르는 물길과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피해 우산을 써야 할 정도다. 그리고 낮은 포복으로 걷는동안 쿵쿵 머리위로 부딪치는 천정은 입구에서 안전모를 건네는 이유를 알게했다.

긴 동굴 터널에서 빠져나와 들린 상가에서 주인아저씨는"개발되기 전에는 동굴의 입구가 좁고 물이 꽉차 있었다"면서 "동굴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았다고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무기가 심술을 부리면 동굴에 물이 말라 동굴에서 놀기도 했다"고 들려줬다. 또 "한국전쟁 때는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로 사용했다"고 말하고 "동굴은 성과 함께 관광지로 마을의 자원이 되고 있다"며 애정을 표했다.

자연과 인간이 빚은 온달동굴과 온달산성은 어찌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을 돋보이게 하는 상징적 장치일런지 모른다. 성을 축조하기 위해 온달이 돌을 파내다 동굴을 처음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 한 개인의 삶이 시대를 건너 들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

◈ 세월이 빗겨간 듯 견고함 자랑

온달산성, 신라성 축조방법 도입… 수직으로 쌓아올려


온달동굴 위에 위치한 온달산성은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영토싸움이 치열했던 곳이다.

약 천 오백년전에 쌓은 성은 삼국시대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내외협축 방식으로 쌓아 육중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성은 세월을 빗겨간듯 견고함과 단단함으로 무장하고 온달장군이 연상된다.

이처럼 단양군 영춘면 일대는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역사·문화적 바탕을 이룬다. 그러면에서 성은 온달을 키워낸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온달이 성을 짓기 위해 돌을 나르다 쉬었다는 휴석동,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눌러 만들었다는 윷판바위, 병사들이 진을 치던 장군목과 대진목, 무기를 고치고 다듬던 쇠골, 전쟁으로 피가 그치지 않았다는 피바위골, 그리고 온달장군을 장사 지냈다는 상리나루 등 성에는 온달과 전쟁에 관련된 지명만 50곳을 넘는다.

이렇게 그 자체가 고구려이자 온달인 산성은 그러나 축조시기에 있어 고구려성인지 신라성인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 중이다.

조순흠 중원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고구려성은 성을 물려나며 성을 쌓은 방식인데 비해 온달산성은 수직으로 쌓아 올린 신라성의 축조방법을 하고 있다"면서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도 중요한데 온달산성은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어 고구려보단 신라성일 것이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문헌에도 온달산성이 아니라 '성산'으로 표기하고 있어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배경이 아니고라도 온달산성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시대를 거슬러 과거에 이르고 있다. 툭 불거진 성둘레는 뱃머리 모양의 긴 타원형으로 지어졌고, 성은 발아래 짙푸른 남한강을 부리고 있으니 시대가, 인물이 따로 없다. 성돌 하나하나로 이어온 현재는 그래서 현재도 아니고, 성도 아니다. 이곳에 서면 거대한 산을 끼고 휘돌아가는 물줄기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 속 바람이 된다.
종류석
석순
드라마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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