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메디치 가문과 예술가들
<149> 메디치 가문과 예술가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14 22: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피렌체 공화궁의 행정부가 위치했던 시뇨리아 광장.
메디치 Money정치·문화 장악 르네상스 성장 원동력

브라만테·미켈란젤로·라파엘로 등 예술 후원
귀족 중심 정치체제서 민주주의 물결 주도
피렌체·베네치아 독립적 예술 부활 일궈내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해 들어오자 그리스 인들은 그리스 고전문화를 대동하고 이탈리아로 다가왔다. 피렌체의 엘리트들 사이에 그리스어 배우기 열풍이 불었다.

코지모는 주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후원자가 되었다. 피치노는 그리스에 정통한 철학계 리더로 성장하여 플라톤 철학을 집대성 하였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설계했을 때 철학과 수학, 과학과 예술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한 부분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처음으로 예술가들이 존경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베키오 궁전.

그 누구도 당시의 예술가들이 그리스인들에 버금가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로마 전역에 그리스 조각들이 묻혀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부자들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마시대의 모사품들이었다. 마침내 그때까지 장인취급을 받던 예술가들이 상류사회에서 오가는 화재의 대상이 되었다. 코지모의 부는 피치노를 대성시켰고 피치노는 플라톤 철학을 집대성했으며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는 예술가들이 국가의 핵심적 구성원이었다. 코지모가 축적한 거대한 부는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세기 말 이탈리아는 정치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는 군주국이었다.

코지모는 1389년에 태어나 1464년에 피렌체의 아버지로 불리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피에트로는 왕처럼 오만불손했지만 결코 왕일 수 없었기 때문에 피렌체를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손자 로렌초는 위대한 지배자가 되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권위를 지키며 온화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영리한 사람답게 자신이 군주처럼 행세하며 신하들에게 많은 보상을 하는 대신에 할아버지 코시모처럼 유럽을 호령할 만큼 막대한 재산을 가진 상인으로 그 시대의 유명인물들과 교제를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그의 운신에 따라 세력판도가 달라질 정도가 되었다. 또한 로렌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들의 독립을 최대한 보장해주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로렌조 디 메디치의 무덤.

로렌초는 특히 젊은 미켈란젤로를 사랑하여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그가 베푸는 연회에 미켈란젤로를 불러들이기도 했으며 그가 미친 듯이 수집한 고대 유물들을 미켈란젤로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코시모는 예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예술을 보호해 주었지만 로렌초는 달랐다. 로렌초는 그 시대 위대한 지배자는 아니었을지언정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피렌체는 예술을 꽃피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피펜체를 찬란하게 빛내준 위대한 예술가들 모두가 로렌초 시대에 태어나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로렌초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레오는 교황이 되었으나 아쉽게도 요절함으로서 르네상스의 꽃은 그 빛을 잃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데생을 기초로 한 회화와 조각과 건축예술이 다시 태어난 반면 베네치아는 회화만이 다시 태어났다.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독립적으로 예술의 부활을 이루어냈고 서로에게 어떤 도움도 영향도 별로 주고받지 않았다.

베네치아도 피렌체 못지않게 풍요롭고 강력한 도시였다. 그러나 엄격한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였던 베네치아는 민주주의 물결이 휩쓸던 피렌체와는 무척 달랐다. 베네치아 정부가 귀족을 위해 만들어진 형태였는데도 세력균형을 절묘하게 이룬 정치적 협상의 산물이었던 까닭에 시민들에게 정부는 조심스러운 지배자로 보였다. 따라서 정부는 시민들의 힘을 늘 두려워하면서 그들에게 상업과 예술을 권장했고 삶의 희열을 마음껏 맛보게 해주었다.

이처럼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시민들에게 열정을 허용했던 까닭에 티치아노, 조르조네, 파올로 베로네세 등과 같은 위대한 화가들이 공화국의 든든한 반석 위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탄생한 회화는 마침내 로마의 티베레(테베레강의 옛 이름) 강변까지 전달되었다. 뒤늦게 옥좌에 올라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지만 자신들을 기억해줄 기념물을 로마에 남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교황들 덕분이었다. 교황들은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을 그들의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화화의 세계를 활짝 꽃피우게 해준 알렉산데르 6세는 로마의 강력한 가문들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불같은 성격의 율리우스 2세도 성 베드로 성당의 재산을 더욱 크게 늘렸다. 그들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로렌초의 아들 레오 10세는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니콜라우스 5세와 로렌초 데 메디치가 뿌린 르네상스의 꽃씨가 그의 시대에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 것이라고 스탕달은 이탈리아 미술편력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레오 10세는 교황에 오른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플랑드르 출신의 히드리아누스 6세가 교황을 물려받았다. 레오 10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은 그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가꾼 로마와 유럽의 제국들은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교황의 옥좌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