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선루의 원래자리는
망선루의 원래자리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0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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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나누는 충북의 문화이야기

역사논술 지도교사 한윤경씨의 "오감체험 문화답사기'가 지난주 30회로 끝났습니다. 이번주부터는 충북지역 중학교 교사 16명이 참여한 "길끝에서 나누는 충북의 문화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망선루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사람들은 청주 역사의 향기가 망선루 기와골에서 솔솔 피어 오른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망선루의 뜻 또한 인상적인데, 하늘의 선녀, 또는 신비한 경치나 은하수 등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혼을 없애는 문화말살정책의 한 방법으로 망선루를 철거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청주청년회 회장이던 김태희 등의 노력으로 현재 쥬네쓰영화관 자리에 있던 것을 제일교회로 이전해 망선루를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민간단체에 의한 최초의 시민운동이며 자발적인 민족문화 보존운동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큽니다.

그 이후 민족 교육 장소와 집회 및 강연장으로 사용되는 등 청주가 자랑하는 민족정신을 키우고 교육문화 도시로 성장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비록 새로 옮기는 과정에서 새 자재를 사용하여 새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이 담고 있는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정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일 것입니다. 지금은 한가로이 망선루에 올라 쉬거나 이야기할 수 있지만 기둥을 잡고 흘러간 시간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 있다 할 것입니다.

망선루 옆에는 윗부분이 깨진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세운 척화비입니다. 비석에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洋, 則자가 깨어져 없어졌습니다. 척화비를 쇄국정책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우리 민족이 자립하고자 하는 정신을 일깨워 주는 유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TIP. 청주읍성의 역사

청주 읍성은 청주 시가지에서 무심천의 동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 신문왕 때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는 것으로, 신라 신문왕 5년 춘삼월에 서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벼슬의 원태라는 인물을 관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4년 뒤 신문왕 9년(689)에는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 청주 읍성은 고려에서 조선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성안에 우물과 12개의 못이 있었고 관아 건물과 민가들이 조밀하였으며 성밖 동서문 남쪽에도 민가들이 밀집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번영하던 청주 읍성의 모습은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어이없게도 일제는 지난 1911∼1914년 사이에 "시가지 개정'을 명목으로 청주 읍성을 헐어 그 돌을 하수구 개축에 사용했습니다.

<자료 제공 : 충북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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