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충남 금산 행정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84호>
19. 충남 금산 행정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84호>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8.09.26 2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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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천연기념물 그 천혜의 비상
커다란 밑동과 둥근 수형의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는 마치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 보인다.
둘레13m·넉넉한 가지 1000년의 위용 그대로

조선시대 대학자 김종직·이율곡 문집서도 등장
커다란 밑동·둥근 수형…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

연숙자기자·생태교육연구소 터


13m의 커다란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지들
약 10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는 요광리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다. 1300년전 허금이라는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이 마을 오씨 선조가 500년 전 전라감사로 있을 때 나무 옆에 행정(杏亭)이란 정자를 지으며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란 이름이 붙여졌다. 요광리 40여 가구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은행나무는 커다란 밑동과 둥근 수형이 마치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 보인다.

인류가 지구 상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나무가 있다. 1억만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은행나무다. 열매 하나로 이어온 나무의 삶은 유구하다. 더구나 한 번 뿌리 내린 곳에서 천 년의 풍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은행나무는 느티나무와는 전혀 다른, 묘한 신령스러움이 느껴진다.

충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그루 은행나무 중 천 년을 살아온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여름 끝자락과 가을의 초입에서 떠난 탐방이라 들판은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며 가을로 향하고 있었다. 조선의 대학자 김종직과 이율곡의 문집에도 등장하는 나무는 충남 금산면 요동리 마을에 터를 잡고 있다.

가을 풍경을 따라가다 추부IC를 빠져나가 5분 거리의 요광리 마을 입구에서 덩그러니 정자와 마주하고 있는 은행나무를 만났다.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벌판에 홀로 서 있어 한눈에 천연기념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대부분 가지를 쭉 뻗고 키다리아저씨처럼 서 있는 은행나무와 달리 커다란 밑동과 둥근 수형은 마치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 보였다.

나무 주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래 전에 설치한 시멘트 기단을 걷어내고 뿌리도 숨 쉴 수 있도록 흙으로 덮고 길을 내고 있었다. 천 년을 지나온 것에 비하면 나무는 크지 않았지만 줄기 둘레는 탐방한 천연기념물 중 가장 으뜸으로 약 13에 이르렀다. 둘레가 주는 위용은 가까이 다가갈 수록 느껴진다. 울룩불룩한 줄기의 웅장함과 세월의 무게로 다가오는 상흔은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 풍상을 견디고 살아온 고된 삶은 뻗어 갈라지는 나무줄기를 잇고 있는 쇠사슬로 드러났다. 더이상 퉁겨져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줄기마다 잡아맨 사슬은 사람의 욕심 같아 보이기도 하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 같아 아릿했다.
행정 은행나무의 커다란 밑둥

둘레를 재느라 나무를 한 바퀴 돌다 보니 뻗어 올린 가지 사이로 덜 익은 은행이 조롱조롱 매달려 눈길을 끈다. 게절을 지나며 여문 시간들이 노란빛으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은행나무 그늘옆으로 정자 하나가 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는 정자는 마을의 오씨 선조가 약 500년 전 전라감사로 지낼 때 지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은행나무 옆에 있다 하여 행정으로 불렸고, 이는 또다시 은행나무를 행정의 은행나무라고 지칭하게 된다. 정자 옆에는 오씨 선조의 공적을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어 마을과 오씨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은행나무 옆을 돌아 뒤편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고샅과 집집마다 한 그루 정도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마실가듯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옴팡하게 들어가 있어 멀리 은행나무 윗부분만 마을 풍경으로 보여줬다. 이러한 지형과 은행나무의 신령스러움으로 일본강점기나 6·25 전쟁에도 큰 변고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천년, 계절이 가고 세월이 무게로 쌓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바람처럼 왔다 떠났을 시간. 이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 속에서 은행나무는 묵묵히 사람들의 기둥이 되어 세상의 중심이 되어주고 있었다.
뻗어 갈라지는 나무줄기를 잇고 있는 쇠사슬

"나라에 큰일 있을때마다 소 울음 울어"

인터뷰 / 유인학 할아버지

"해방될 때까지 만세를 부르고 있던 은행나무가 해방되던 해에 가지가 부러져 잘려나갔대. 해방의 기쁨을 나라와 같이 한 거지. 부러진 가지로 판자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3사람이 누워 있어도 될 정도였다니 크기가 굉장했던거지"

평생 요광리 마을에서 살았다는 유인학(71) 할아버지는 은행나무를 마을만이 아니라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목이라고 말한다.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엉엉 소 울음소리로 울었다"는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도 주변 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 식량도 뺏아가고 사람도 잡아갔지만, 우리 마을에는 아무런 피해가 나지 않았다"며 모두가 신령스런 은행나무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령스러움과 놀이터로의 생활문화공간이 되었던 나무는 "여름이면 나무 밑이 하얗게 보일 만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놀았다"면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은행나무 앞에 작은 저수지가 있어 낚시도 하고, 은행나무를 지나 굴다리 너머로 대전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고 들려줬다.

사람이 사는 곳에 자라다 보니 나무는 불에 타는 수난도 겪는다. "나무 아래서 뱀을 궈워먹다 불이나 3개월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윤 할아버지는 "꺼진듯한 불씨가 계속 살아나며 나무 속을 태워 진흙으로 간신히 불길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까맣게 탄 속내로 비가 들어가 썩게 되자 외과수술로 구멍을 메웠다.

수호목으로 은행나무 앞에선 1년에 한 번 초 사흗날 제의식도 행한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사흘 동안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한 뒤 제를 주도한다"며 "이날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마을 뒷산인 동모산에서 먼저 제를 지낸 뒤 은행나무에 제사지내며 잔치를 벌인다"고 들려줬다.

나라를 걱정하고 마을을 지켜주며 오랜 세월 선조의 삶과 문화 속에 살아온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 푸른 천 년의 세월이 새로운 천 년으로 이어지며 후손들의 미래와 함께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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