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괴강의 이름으로 ②
<17> 괴강의 이름으로 ②
  • 김성식 기자
  • 승인 2008.09.16 2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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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

괴산 목도 부근의 달래강괴산 목도 인근의 구경바위 건너 편 절벽에는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 물결과 먼 산 위로 피어 오른 흰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남한강과 더불어 조곡 운반하던 뱃길 역할


감물 유창리·불정 남창리 등에 漕倉 지명
목도까지는 노·삿대로 움직이는 배 다녀


김성식 생태전문기자 <프리랜서>
이상덕기자

선사 이래로 강줄기는 그 자체가 인간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물류이동의 근간이 돼 왔다. 남한강을 포함한 한강 줄기 역시 한반도인들에겐 생명과도 같은 젖줄이었다.


선사시대 이후의 문화유적 다수가 한강과 남한강변을 따라 산재해 있고 뱃길, 즉 수운(水運)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포구와 창고들이 아직도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있음은 이를 입증해 준다.
수운은 단순히 강 하구의 해산물과 내륙의 농·임산물을 실어나르는 물류 이동 외에도 나라 살림의 근간이 되는 조세(세곡)를 운반(漕運)하는 중요 역할까지 담당해 왔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래강에도 오래전부터 조운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조창(漕倉?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강변에 설치한 창고)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초의 13조창 가운데 하나인 충주 덕흥창과 조선시대 조창인 연천 곶창(串倉), 앙엄 곶창이 그것이다. 고려 덕흥창은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강안의 여수포에 있었으며,조선시대 연천 곶창은 충주의 서쪽 10리(가금면 창동리)에, 앙엄 곶창은 충주의 서쪽 60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 조창을 통해서는 충주,단양,청풍,괴산,음성,연풍,제천 등지에서 걷힌 세곡이 수도의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


100년 전(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오간리 포구(괴산군 감물면 오간리)를 뒤로 하고 왼쪽으로 물굽이를 틀어 만나게 되는 곳이 유창리(有倉里)인데 지명에서도 풍기듯이 이 마을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었던 곳이다. 또 유창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불정면 남창리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어 인근지역서 거둬들인 세곡들을 달래강 뱃길을 통해 충주쪽 곶창으로 옮겼다가 다시 남한강 배편으로 경창으로 옮겼다.


지금으로부터 324년전인 1684년(숙종 7년) 발간된 규장각도서 괴산군 읍지 창고편에 보면 유창리 조창에는 쌀 93석 11말 4되 9홉 가량이 걷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창을 통해선 또 공물도 조달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충주·괴산 지역에서는 꿀,칠,대추,지초,여우가죽,수달피,삵가죽,족제비털 등이 바쳐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배편으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1930년 이영(李英)이 지은 '충주발전사'에 의하면 충주부터 하류까지는 결빙기나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항행했는데 충주 탄금대(달래강과 남한강 합류점)로부터 서울 용산까지 약 315리를 여름철에 하행할 경우 약 1215시간, 상행할 경우는 57일 가량 소요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강물이 많아 뱃길이 순조로울 경우이고 보통은 하행시간이 3일,상행시간은 10일에서 2주일 가량 걸렸다고 한다. 배는 돛단배였으며 한 배의 적재량은 많게는 40석, 보통은 3525석 가량이었다고 전한다.  

소금배 드나들던 미륵댕이달래강으로 신항천이 흘러드는 미륵댕이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형이 크게 변해 있다.

유창리에서 다시 하류로 내려가다 보면 강 건너 편에 '고려말 철안석불좌상(충북문화재자료 27호)'이 서있는 미륵댕이(지장리)란 곳으로 달래강 지류인 신항천이 흘러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 미륵댕이를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구경바위'다.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경바위를 호기심에 올라서니 전해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다. 동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 푸른 물결이 소나무 가지의 자유스런 몸짓과 어울어진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눈길을 돌려 수십길 아래를 바라보니 강물 위로 기다란 바위 면이  잠길 듯 말 듯 빼곰이 나와있다. 송장바위다. 얼핏 보니 진짜 물위에 떠 있는 송장처럼 보인다.


구경바위 건너 편으로는 또다시 오른쪽으로 절벽이 나타난다. 지금은 절벽 밑으로 유창리를 드나드는 도로가 개설돼 있어 옛 정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절벽 한 쪽에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이나 빼어났던 곳이다.

구경바위에서 바라본 달래강괴산군 불정면 미륵댕이를 지나 목도쪽으로 가다보면 강변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내는 구경바위에서 내려다본 ‘송장바위’.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을 배경으로 '소금강'의 전경을 촬영하려 하는데 때마침 가을바람에 한층 높아진 하늘 위로 흰구름 한 무리가 산자락 끝에 매달려 재주를 부린다. 가히 절경이다.
절경을 뒤로하고 이내 들어선 목도(괴산군 불정면 면소재지)에는 미리 약속한 향토사학자 김영수·김영식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차 한잔을 마시며 김영수씨로부터 "불정면 목도리는 예부터 '목나루'라고도 불렸는데 한자로는 기를 목(牧), 건널 도(渡)로 음성천과 달천강의 합수머리 들판서 말을 많이 길러 목나루라 한 것이 지금의 목도가 됐다"는 유래를 듣고는 예전에 목나루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목나루는 지금의 목도교 바로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김영수씨(74)에 의하면 남한강 줄기에는 두 개의 큰 나루가 있었는데 그 중 남한강 본류에 있는 충주 엄정면의 목계나루가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이곳 목도나루가 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목도가 불정면 소재지가 되면서 목도나루가 생겼고 1938년 인근에 제방이 쌓이면서 시장이 더욱 번창했으며 1959년 나루 바로 위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질 때까지 나루가 운영됐다고 한다.

예전의 목도나루를 설명하는 향토사학자 김영수(오른쪽)·김영식씨.

목도나루는 장호원-음성-목도-연풍-문경 혹은 장호원-음성-목도-입석-상주를 잇는 중요 길목으로서 주요 이용자인 음성군 소이면 일부와 괴산군 불정·감물면 전역, 장연면 일부지역 사람들이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씩 모두 380여 석을 모아 뱃삯으로 주었다고 한다. 목도나루의 나룻배는 낙찰제로 운영됐으며 대략 일년에 벼 160여 석에 낙찰됐다고 한다.

김씨는 또 남한강 뱃길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증언을 해줬다. 그에 의하면 남한강 본류까지는 커다란 황포돛단배가 다녔지만 지류인 달래강으로는 그보다 작은 배, 즉 노와 삿대로 움직이는 배가 다녔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 배의 길이가 대략 22자 정도(67m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당시에는 배가 여울을 통과할 때 동원되는 장정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으며 목도시장 안에는 주막도 많고 상점도 많아 '돈'이 많이 오갔기 때문에 주변에는 소위 어깨잡이들이 들끓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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