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고향은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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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역시 명절의 맛은 떠남과 어울림에 있는 것 같다. 고향을 향해 가족과 함께 먼길을 재촉하고 친척집들을 옮겨 다니며 차례를 지내는가 하면,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없이 한데 어울려 성묘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물리지가 않다.

명절을 앞두고 서로 건네는 인사 중에 단연 빈도가 높은 것은 "어디로 가십니까"와 "어디에서 쇠십니까"다. 이 때 현재의 거주지에서 명절을 지낸다는 대답을 들으면 솔직히 좀 안돼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명절하면 시골 고향이고 고향하면 되도록 멀리 있어야 느낌이 더 하다.

사상 유례없는 무더위속의 추석이었지만 휘영청 솟아 오른 보름달은 모든 시름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제 아무리 혹독하다는 경제난도 고향의 넉넉함 만큼은 빼앗지 못했다.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고 오랜만에 코흘리게 시절을 같이 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냈다.

시골에서 명절 하면 우선 떠오르는 풍경은 집 앞마당에 죽 늘어선 승용차들이다. 80년대엔 한집 건너 한 두 대였던 것이 90년대부턴 외지에 나간 자녀수로 늘어나더니 요즘엔 차종도 다양화되고 고급 승용차가 많아졌다. 특히 올해 추석엔 집집마다 외제승용차가 눈에 많이 띄었다.

아닌게 아니라 시골에선 명절 때 그 집의 자식들이 어떤 차를 타고 오느냐가 부의 척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옷도 제대로 못 입던 70년대까지는 신사복을 입고 고향에 왔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지금은 그 역할이 고급승용차로 대체된 것이다. 때문에 꼭 명절에 맞춰 열리는 시골 동창회에선 돈을 많이 번 녀석들의 고급승용차가 유난히 돋보인다. 이 정도의 치기는 늘 있어 왔지만 이상하게도 올해는 그런 분위기가 더 심한 것 같았다. 간만에 찾은 고향에서조차 생뚱맞게도 양극화가 느껴졌다.

올 추석에도 안타까운 자살이 많았다. 남들이 들떠 있을 때 한 젊은 주부가 가난의 한을 못 이겨 자식을 안고 지하철로 뛰어 들었고 어느 노부부는 넉넉지 못한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아파트에서 몸을 날렸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몸서리를 친다. 처음엔 '왜 그랬을까'를 탓하다가 나중엔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를 원망한다. 결국엔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된다.

심리학자들이 내놓는 명절의 자살 동기는 분명하다. 상대적 박탈감이다. 평소에는 그냥 묻혀 살다가도 명절이라는 구체적 계기에 부닥치면 그동안 쌓였던 결핍이나 난관 등이 역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며 한꺼번에 심한 압박감으로 다가 온다는 것이다. 이 때 희망과 가능성의 끈을 놓으면 그 다음은 극단적인 선택이다.

고향을 찾은 가족들도 사는 형편이 크게 차이나면 서로 불편하다. 이런 감정이 대책없이 누적될 경우 가족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조직이나 사회를 이완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구성원간의 거리감이다. 이는 이념이나 사상, 물질 어느 것에도 해당된다.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며 때로는 채워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세계 최고 갑부들의 부의 척도는 메가로 불리는 초호화 요트라고 한다. 길이가 100m나 되고 한꺼번에 수천개의 와인을 실을 뿐만 아니라 거품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조가 있고, 게다가 헬기장까지 갖춘, 한대값이 무려 4∼5억달러 이상이라니 우리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이다. 그런데도 상대보다 더 호화로워야 한다는 이들의 박탈감이 심상치 않다는 보도가 있었다.

얼마전 지역의 명망가들이 '미리 쓴 유서'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문화단체의 주선으로 책자화된 것인데 그 내용의 핵심은 하나같이 '비움'이었다. 당시 글을 쓴 한 인사는 "아직 멀쩡한데 유서를 써달라고 해 처음엔 황당하기까지 했지만 막상 죽음을 전제로 글에서나마 집착을 버렸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고향에서 모처럼 만난 보름달과 누런 황금 들녘의 풍요로움은 우리에게 역으로 이런 '비움'을 가르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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