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끝내 그리지 못한 유다의 그림
<145> 끝내 그리지 못한 유다의 그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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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식당 벽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벽화로 유명한 밀라노 산타마리아델라그라치에성당.

화가…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르네상스시대 빛나는 문화 아이콘


간악한 유다 얼굴 위해 1년이상 고민… 철저한 준비과정속 작품 탄생


로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수도원장을 불러 레오나르도의 대답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폐하, 그는 유다의 얼굴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후로 거의 1년 이상을 붓조차 잡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당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수도원장의 얘기를 듣고 로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화를 내면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유다의 얼굴만이 남아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듯이 유다는 천하의 못된 불한당입니다. 그의 얼굴은 악랄하고 간악하게 그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1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밀라노의 불량배들이 모여 살고 있는 보르게토를 뒤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얼굴과 딱 맞아떨어지는 간악한 얼굴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친 후 레오나르도는 얀 반 에이크가 새롭게 발명해낸 방법에 따라서 유채로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언제든지 수정하면서 완벽을 지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채는 레오나르도의 성격에 딱 맞아떨어지는 방법이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1495-1498년 제작. 벽화 템페라. 460 x 880cm.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델라그라치에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벽화로서 1999년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에 이르는 내용을 조형화한 것이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사람들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한 군주였다. 그래서 1515년 정복자로서 밀라노에 입성했을 때 '최후의 만찬'을 프랑스로 옮겨가려고 했다. 그는 건축가들에게 수도원 식당의 벽을 그대로 뜯어내서 프랑스까지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캔버스에 그 그림을 옮겨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 당시 최후의 만찬은 눈부신 색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1540년에 아르메니니는 그 그림이 절반쯤 지워진 상태라고 말했고 1560년에 들어서는 색은 거의 사라졌으며 윤곽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라고 로마초가 전해주었다. 1624년 사르트르 수도회 수도자 사네즈는 윤곽마저 사라져 거의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1652년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자들이 식당에 들어가는 입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구세주와 그 곁에 그려진 제자들의 다리를 과감하게 잘라내면서 식당 출입구를 확장하여 최후의 만찬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반면에 1726년 수도자들은 레오나르도의 비법을 알고 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벨로티라는 엉터리 화가에게 복원을 맡김으로써 그 위대한 그림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15세기 르네상스미술은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최후의 만찬에 덧칠된 벨로티의 색도 여지없이 퇴색되어갔다. 그래서 템페라법으로 다시 채색되었는데 1770년 그 그림을 복원하는 문제가 또다시 제기되었다. 격론 끝에 밀라노의 총독이었던 피르미안 백작의 추천으로 만차(Mazza)라는 화가에게 복원을 맡겼지만 이 불경한 사내는 레오나르도 이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소중한 색의 흔적을 굴뚝 청소용 철조각으로 긁어내는 대담한 짓을 저질러 그림을 훼손하고 말았다.

1796년 나폴레옹 장군이 그라치에 수도원을 점령하고 그곳에 병사들을 주둔시켰지만 위대한 그림을 존중해서 수도원 영내에는 절대 막사를 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발걸음 소리를 죽이기 위해 무릎으로 걸으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장군은 명령을 어기고 수도원 문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그림이 그려진 식당을 마구간으로 사용했다.

1800년대에는 대홍수로 인해 식당이 30cm 가량 물에 잠기는 일이 발생했다. 1807년에 수도원은 병사들의 막사가 되었지만 나폴레옹 대신에 밀라노를 다스린 처남인 외젠 드 보아르네가 레오나르도의 이름을 존중해서 식당의 복원에 나섰다.

최후의 만찬을 원화와 똑같은 크기의 모자이크로 복제하는 작업을 외젠 드 보아르네는 보시에게 그 일을 맡겼다. 파비아의 수도원과 카스텔라초에 있는 최후의 만찬 복제화를 직접 본 후에야 비로소 밀라노 시민들은 외젠 부왕이 임명한 보시라는 화가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고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그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에서 밝히고 있다.

요즈음 유럽 명소가 소설 속에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델라그라치에 수도원은 이 소설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 관광객이 몰려 예약 없이는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도 잃어버린 성배(聖杯)를 찾을 수 있는 암호가 로슬린 채플에 숨겨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을 포함하여 소설의 무대가 된 주요관광지를 돌아보는 관광 패키지 상품까지 등장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문학예술과 관광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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