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에 쓴 편지
고향 가는 길에 쓴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2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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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길을 무심코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그저 어딘가로 향하거나 무조건 목적지만을 향하는 수단이 아닌 우리의 흔적과 추억, 그리고 삶의 궤적을 반추하는 대상으로의 '길'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허생원과 동이의 묘한 인간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길'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 길에는 알듯 모를 듯한 부자지간의 이끌림과 감춰둔 속정이 있습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 '삼포'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막노동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정씨와 역시 노동자인 영달은 낯선 곳을 방랑하면서도 고향을 향하는 꿈의 끈을 좀처럼 놓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술집작부 백화의 타향에서의 도망침은 정씨와 영달과 더불어 이들 세 떠돌이들에게 체화된 이질감을 '고향'이라는 매개를 통해 찾고자 하는 영원한 안식의 추구일 것입니다.

그곳을 향하는 과정 역시 '길'을 통해서입니다.

이제 도심의 '길'은 잠시 동안 비어 있겠지요.

그 대신 해마다 되풀이되는 귀향길로 도심을 나서는 길들은 몸살을 앓을 터이고, 또 차들과 고향을 향하는 자식들은 색다른 홍역을 치를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상투적인 일들에 대한 예상을 빗나갈 수도 있는 올 추석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금메달 소식에 환호했던 희열도 희미하고 도대체 기쁠 것이 없는 지친 일상에, 늦더위는 아직 가을을, 그리고 추석을 실감나지 못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유난히 짧기만 한 올 추석연휴는 꽉 막힐 것이 뻔 한 도로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물가는 어찌나 우리 서민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지 도무지 신나는 일이란 찾을 수 없고, 이러다가 희망을 갖는 일 조차도 잊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창호 감독은 2006년 개봉한 영화 '길'에서 직접 주인공 태석역을 맡으며 떠도는 자의 정화된 단상을 말합니다.

숙명처럼 짊어진 대장장이의 모루와 연장은 삶의 무게와 지나온 인생의 역정을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집과 그리하여 태석을 더욱 정처 없이 떠돌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돌아갈 수 있는 여력과 희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로 인해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편안한 휴식 같은 여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우리가 종내 떠돌지 않고, 또 혹시라도 그릇된 판단을 했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입니다.

고향가는 길은 그런 것입니다.

이제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좀 더 잘살아보겠다는 발버둥으로 도회로, 도회지로 도망치듯 떠나 왔던 고향의 고샅길은 지금도 눈에 선해 마음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슴 먹먹하게 하는 아버지, 어머니 그 이름이 있고

그리고 그곳엔 누구든 용서하고, 누구든 정신을 차리게 하는 신비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이제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도시를 닮아가고, 모든 그리운 이들이 세상을 등지고 나면 그저 사는 곳이 고향이다, 내가 가는 '길'이 그래도 바른 길이라고 억지를 부려가며 마음 허무하게 떠도는 일에 익숙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짧은 고향가는 길, 모처럼 마음 다잡고 익어가는 벼이삭 만져보며 그 경건한 고개 숙임의 의미를 되새겨 볼 일입니다.

지금쯤 고향엔 풋감이 파랗게 희망을 기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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