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루가 활자의 탄생
<4> 스루가 활자의 탄생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09.08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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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정권을 잡은 후 나무활자, 금속활자 사업에 치중해 1615년 일본 최초 금속활자인 스루가 활자를 만든다. 교토 원광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나무활자본을 소장하고 있다.

직지 간행 238년만에 日 금속활자 주조

1615∼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도로 제작
인쇄·출판 통해 정치·학문·사상 체계 기틀 마련


고려가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 금속활자로 직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를 출간한 지 238년 만인 1615년에 이어 1616년 일본은 동활자 인쇄를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 주도로 이뤄진 스루가활자(준하판·駿河版)의 탄생이자, 일본 최초의 금속활자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정유재란 때까지 조선에서 동활자와 서적을 약탈해 '금속활자'에 눈을 뜬 지 23년 만이었다.

집권 2년 만에 권력을 장남에게 세습한 후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1607년 도쿄를 떠나 어린시절을 보냈던 슨푸성(駿河城)으로 근거지를 옮겨 생활하면서 나무활자와 금속활자 사업을 펼쳤다. 스루가는 일본의 한 봉건국가 영지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시즈오카(靜岡)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란 이듬해였던 1593년 일본 천황에게 조선의 동활자를 헌상한 시점부터 조선의 나무활자와 놋쇄활자, 구리활자를 이용해 금속활자 인쇄물을 출판하려는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던 셈이다. 이때 출판된 서적이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11책과 군서치요(郡書治要) 47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스루가판을 찍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이 중 한 가지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를 도와 일본 전국 통일에 기여한 인물. 임진왜란 때는 선봉에서 서서 잔인하게 싸워 조선에서는 그를 '악귀 기요마사'라고 불렀다)가 약탈해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친 것을 다시 일본 천황 고요제에게 헌상한 금속활자를 빌려 만들었다는 것이 하나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가토 기요마사의 둘째딸이 스루가 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아들 요리노부에게 시집갈 때 선물로 가져간 것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점에 대해 일본 학계는 통상 이에야쓰가 천황에게 빌려 만든 것을 정설로 여기는 듯하다.

히로무 오가타(緖方宏大) 일본 돗반인쇄박물관 학예원은 지난 4일 청주예술의 전당 대회의실에서 열린 2008 청주직지축제 기념 '조선왕실 주조 금속활자 복원사업'관련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일본돗반)인쇄박물관의 근황과 근세 인쇄역사에 대하여'를 주제로 한 발제문을 통해 "도요토미 정권에 의한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의 동활자나 서적 등을 일본으로 가져와 그 동활자를 당시 천황에게 헌상했다. 이에야쓰는 이 활자를 천황으로부터 빌려 인쇄공들이 만들게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이에야쓰는 자신이 만든 것과 빌린 활자를 천황에게 반환했는데, 모두 2셋트를 제작해 한 개는 수중에 남겨 놓았다"고 밝히고 "주조방법은 조선의 활자 제작 방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에야쓰는 조선의 동활자 제조법을 조선으로부터 익히고, 당시 일본 화폐 제조방법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에야쓰는 이때 3회에 걸쳐 모두 11만 개의 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에야쓰가 죽은 후 2/3가 소실되고, 나머지는 도쿄 돗반인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에야쓰는 금속활자 출판사업에 앞서 교토(京都)에서 나무활자(木活字)를 활용한 인쇄·출판사업을 했다. 이는 일본 최초 금속활자 스루가 활자가 탄생하게 된 근간이 됐다. 이 목활자의 사업 무대가 교토의 후시미(伏見城)였던 것에 유래해 이에야쓰의 후시미판(家康의 伏見版)으로 불려진다.

이에야쓰는 1599년 인쇄사업을 담당했던 閑室元佶(간시쓰겐키쓰)에게 나무활자 10만개를 넘겨 주며 출판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후시미판 목활자 인쇄는 1606년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때 병서와 정치 관련 서적 7종류를 출판했다.

교토 원광사(圓光寺)가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이에야쓰의 후시미판 목활자와 서적은 1992년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목활자 사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무관하지 않다. 목활자 사업이 진행된 후시미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년 거처였기 때문이다. 그가 교토 모모야마(挑山) 후시미성에서 만년을 보내다 사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에야쓰는 패권을 잡은 후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약탈한 활자 유물을 그대로 손에 넣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豊臣秀賴)에게 나무활자 출판을 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히데요시의 아들 주도로 이뤄진 출판물은 삽화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야쓰의 인쇄본에는 삽화가 모두 빠져 있다.

이에 대해 오가타 돗반인쇄박물관 학예원은 "전후 권력자들의 대항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은 이때 만들어진 후시미판 목활자와 금속활자 스루가판으로 이어진 인쇄·출판 사업과 서적 출간에 힘입어 정치제도와 학문, 사상 체계의 기틀을 마련한다.

활자인쇄에 힘임어 서민과 상인들의 학문열이 일어 봉건 영지마다 이들을 위한 '절간 공부방(寺小屋)'이 퍼졌다. 왕실과 사찰 승려 등 특권층이 독점했던 불경과 유교서적, 의학서적이 서민들의 것으로 진화된 계기가 됐다.


◈ BC 100년 한나라 첫 문자 사용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하는 '활자'는 BC 100년 중국 한나라가 문자를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1041년 송나라 시대 교니활자가 처음 만들어 졌고, 1298년 원나라 시대에 나무활자 출판이 시작됐다.

송, 원나라 영향을 받았던 고려는 일찍 활자에 눈을 떠 1377년 현존 세계 최고 금속활자 직지를 만들었다. 독일 구텐베르크는 1453년∼1455년 사이 '42행 성서'를 금속활자로 찍었다.

한반도에 활자문화에 영향을 줬던 중국은 명나라 시대였던 1490년에서야 동활자 인쇄를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금속활자에 눈을 뜬 일본은 1593년 조선에서 가져간 동활자로 고문효경을 찍었다.

이어 1615년,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동활자 주조에 성공해 유교 서적을 찍기 시작했다.

중국은 1877년 서양 활판인쇄로 모국어 사전을 출판하는 등 오히려 서양의 인쇄술에 힘입어 근대적인 출판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이후 금속활자를 손에 넣었던 일본은 출판물이 쏟아지면서 빠른 속도로 정보가 전파돼 정치체계, 사상, 문화, 예술 등 각 분야가 변화했다.

일본은 금속활자 도입 이후 200년간 평화시대를 누리다 메이지 유신을 맞는다.

유럽 역시 금속활자 보급 영향으로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 역사적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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