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괴산호에서 괴강으로
<15> 괴산호에서 괴강으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0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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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
◈ '두 물'로 흐르는 괴강 괴산댐을 지난 괴강은 몸을 추스리며 잠시 흐르다 지류인 쌍천과 만나는데 그 장면이 매우 특이하다. 즉 하나의 제방 안으로 두 물이 흘러들어 곧바로 합류하는 게 아니라 1km 가량을 근접해 흐르다가 두천2리 앞에서야 드디어 하나의 물이 된다. 위로 보이는 '맑은 물'이 쌍천이다.
골골이 새겨진 名詩 다양한 서체로 전해져

괴산호 중류에 이어진 갈은구곡 '仙境'
애한정엔 학동들 글읽는 소리 들리는 듯


김성식 생태전문기자
이상덕기자


괴산호(칠성호) 유역은 한 마디로 구곡(九曲)의 연속이다. 그만큼 예전엔 주변 경관이 빼어났다는 증거다. 지금은 비록 물에 잠겨 '잊혀진 절경'이 됐지만, 바위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으로 그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거차비구곡과 운하구곡이 상류 쪽에 있고 그 아래로는 최근 그 실체가 밝혀진 연하구곡이 늘어서 있다.

또 괴산호 중류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갈론계곡에는 역시 최근에 실체가 밝혀진 갈은구곡이 '괴산호의 제2장'처럼 펼쳐져 있으니 이 어찌 구곡의 연속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갈은동 3곡 '강선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갈론마을 위쪽에 있는 갈은구곡은 제1곡 갈은동문(葛隱洞門)을 시작으로 2곡 갈천정(葛天亭), 3곡 강선대(降仙臺), 4곡 옥류벽(玉溜壁), 5곡 금병(錦屛), 6곡 구암(龜岩), 7곡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8곡 칠학동천(七鶴洞天), 9곡 선국암(仙局암)에 이르는 일련의 절경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 곳 역시 각 곡마다 바위에 새겨진 한시가 전하니 이것이 곧 갈은구곡시(葛隱九曲詩)다.

갈은구곡을 최초 설정하고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구곡내 바위에 전덕호(全德浩), 홍승목(洪承穆-홍명희의 할아버지), 이원긍(李源兢)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9곡에는 사노동경(四老同庚)이란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앞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거나 그와 친한 동갑내기 네 명이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갈은구곡과 갈은구곡시의 특이한 점은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9곡 선국암에 실제로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는 것과 각 곡마다 새겨진 한시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수의 외형적 형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으며 새겨진 서체 또한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극동대 외래교수)는 "갈은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지으며 어울렸던 사람들은 노장사상과 신선사상, 선인일치(仙人一致) 사상 뿐만 아니라 주자학적 학문도 겸비하고 다양한 서체까지 섭렵한 고고한 시인묵객들"이라며 "따라서 갈은구곡은 이들이 이룩한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한시 학습의 야외강의실이요, 서체 연구의 자연학습장"이라고 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옥녀봉 아래의 9곡 선국암에 새겨져 있는 한시를 보자. '玉女峰頭日欲斜(옥녀봉 산마루에 해는 저물어가건만)/ 我棋未了各歸家(바둑은 아직 끝내지 못해 각자 집으로 돌아갔네)/ 明朝有意重來見(다음날 아침 생각나서 다시금 찾아와 보니)/ 黑白都爲石上花(바둑알 알알이 꽃되어 돌위에 피었네)'(이상주 역)기막힌 표현 아닌가. 전날 놓아두었던 바둑알이 모두 꽃으로 변해 돌위에 피어있단다.

선국암의 마지막 싯귀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한참을 앉았다 돌아서는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몇 번을 뒤돌아 보며 가까스로 빠져나온 계곡 입구에 또다시 괴산호의 푸른 물결이 햇빛에 반짝인다.

선경(仙境)을 지나 이곳서 달래강 본류와 합쳐진 계곡물이 곧바로 푸른빛을 띤다. 그 맑디 맑던 유리알 물빛이 괴산호를 만나면서 금새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니 변화무쌍한 물의 인생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화할 줄 아는 물의 섭리리라. 먼 옛날 갈은구곡을 찾아 감흥을 노래하던 시인묵객들도 두 물이 스스로 합쳐지는 것을 보고 이러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괴산호는 물흐름이 빠르다. 다른 호수 같으면 몇날 며칠이고 머물렀다 흐르련만 괴산호의 물은 성급히 흐른다. 댐이 세워질 때부터 발전 전용댐으로 지어진 데다 규모 또한 매우 작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20∼30km 떨어진 상류 쪽 물이 댐 수위에 미치는 영향이 불과 한 나절이면 나타나 곧바로 수문 조작에 들어가야 한단다. 홍수조절 기능이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 괴산댐 방류 발전 전용댐인 괴산댐은 홍수조절 기능이 거의 없어 상류 쪽에 웬만한 비가 오면 수문을 열고 방류한다.

괴산호의 물이 댐을 벗어나려면 두 개의 수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하나는 발전용 취수구를 통과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댐위에 세워진 7개의 수문을 통해 낙하하는 길이다. 평상시 대부분의 물은 발전용 취수구를 통해 흘려보내지지만 홍수때에는 댐 위의 수문을 통해 방류된다. 수문을 여는 갯수는 댐 상류 쪽의 유입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올해 7개의 수문을 모두 연 것은 지난 7월 25일 단 한 번 뿐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댐 수문을 통해 흘려보낸 최대 유하량은 지난 1980년 대홍수시 기록한 초당 5,300톤이다. 당시 댐 위 오른쪽 공도교(댐을 공용도로로 사용토록 설계한 다리)를 3.15m나 월류했다고 하니 가히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렸는지 짐작이 간다. 이 때 댐 주변건물이 완전 유실되고 본관과 주기기가 침수피해를 입어 1999년부터 6년간 대대적인 복구공사를 한 바 있다.
◈ 애한정 대문서 바라본 괴강애한정은 현재 2채가 있는데 윗채가 조선 현종때 옮겨지은 것이고 아랫채가 본래의 애한정이다. 본래의 애한정 대문에서 괴강을 바라보니 괴산∼연풍간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댐을 벗어난 달래강물은 또다시 '괴강'이란 이명으로 불려지면서 외사교를 지나 두천리서 지류인 쌍천과 합류하는데 합류장면이 매우 특이하다. 즉, 하나의 큰 제방 안으로 두 물이 흘러들되 곧바로 합류하는 게 아니라 1km 가량을 근접해 나란히 흐르다가 두천2리 앞에서야 드디어 하나의 물이 되는 것이다. 두천리란 이름은 '두 물'이 나란히 흐르다 만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는데 한자로는 생뚱맞게도 '杜川'이다. 두천리를 지나면 이내 왼쪽으로 거대한 절벽 밑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괴산의 명소이자 매운탕집과 횟집들이 밀집한 괴강다리와 느티여울(槐灘)이다. 느티여울 옆 검승리 정자말 언덕에는 지금도 학동들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듯한 옛 정자가 느티나무 숲에 고즈넉히 들어앉아 있는데 이 곳이 괴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린다는 애한정(愛閑亭)이다.

지방유형문화재 50호인 애한정은 조선 선조때 유현(儒賢) 박지겸선생이 세상을 피해 지내던 곳으로 애한정 앞에는 현재 동몽선습비가 세워져 있다. 동몽선습은 박지겸 선생의 할아버지인 박세무(朴世茂)선생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교과서로서 박지겸선생은 바로 이곳 애한정에 내려와 학문을 연구하며 때론 아이들을 불러모아 동몽선습을 가르침으로써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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