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는
9월에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03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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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조 의 영 <수필가>

일본에 가서 거리를 걷다보면 다양한 간판들을 볼 수 있다. 상점의 특색을 살려 독특한 캐릭터를 그려 넣기도 하고 동물을 상징적으로도 그려 넣었다. 오직 한 상점만을 위한 색깔과 글자의 모양, 그리고 개성 있는 문구들을 보면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중 '자식과 부모만의 체험, 공짜로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써 있는 노란색 간판이 가장 인상적이다. 전철을 타고 가다보면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달의 달력을 그려넣고 하루 하루 할 일을 적어 놓았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한자도 없다. 또 귀여운 동물들의 캐릭터를 그려 넣어서 정겹다

간판의 제목에서 느끼듯 공짜로 할 수 있는 일들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힘껏 점프해보기', '친구를 만나러 가기',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기', '밤하늘 별들의 수를 세기', '악수하기' 따위들이다.

내가 간 날은 '그림자를 밟기' 날이다. 소솜 그림자를 밟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동경의 하늘은 흐렸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국지성 호우가 잦고, 낮은 맑았다가 저녁이면 비가 내리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을 보니 해를 쫓으며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이 아슴아슴했다.

나의 형태, 나만 따라다니는 그림자. 내 것은 밟을 수 없기에 혼자서 할 수 없는 놀이다. 그러나 여유로운 자유가 있다. 다양한 상상이 있다.

그림자는 평등하다. 색이 없음이 하나이고 남녀노소 구별 없음이 그 또한 하나다. 부(富)의 과시가 담겨 있지 않으며 주름살 깊은 얼굴도 흰머리로 변한 세월도 그림자는 똑같다.

나이가 없는 것도 그림자다. 여든의 등 굽은 할아버지나 구구단을 외우는 초등학교 2학년이나 구분 짓지 않는다. 직장을 잃은 사람의 시름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미소도 그림자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검은색이 주는 가장 편안한 아름다움이다.

간판을 보면서 나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달력을 만들어 보리라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지금까지 해온 성실과 책임, 다짐, 의무 같은 생활계획표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느낄 수 있고 나 자신을 사랑하며 이웃과 정겨움을 나눌 수 있는 것들.

'씨앗 받기', '나뭇잎 줍기', '곡식이 익어가는 들녘 걷기', '하하하 소리를 내어 크게 웃어보기', '풀벌레 소리 듣기', '멀리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편지쓰기', '가을 하늘 보기' 따위

그동안 누군가를 위하여 라는 말 속에 숨겨진 위선이 하나 하나 벗겨지는 기분이다.

달이 바뀌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하다. 가을 냄새가 조금씩 짙어지고 있음도 느낀다. 개학을 하면 맨 먼저 9월 달력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꿈 많은 우리 아이들과 함께 가치 있는 일들을 찾아보는 소박한 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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