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전된 여자
방전된 여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27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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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신 종 석 <시인>

정수리에 쏟아 붓던 태양의 열기는 숨죽은 초록숲속에 숨었다. 목이 터져라 사랑노래를 불러대던 매미의 열정도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렇다고 특별히 인사를 하거나 다음날을 기약하는 말을 남기지도 않았다. 태양의 눈매는 한껏 부드러워졌고 시도 때도 없이 퍼붓던 여름소나기도 멈추었다. 가을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반갑기만 하다.

여름이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가듯이 나의 꿈과 희망과 사랑도 도둑고양이처럼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는 게 올을 성싶다. 이제 나는 어디를 보아도 자존심을 칼날처럼 세운 오만한 나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은 나의 꿈을 위해 존재한다는 방자한 생각을 할 나이도 아니다. 나의 삶은 우아하고 행복하기만 해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도 의미를 잃었다. 멋있는 남자가 차 한잔을 마시자는 제안에 "나 바빠요"하고 거절할 나이는 더욱 아니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주어진 일에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싱싱한 젊은이들이 그저 아름답고 대견해 보이며 부러울 뿐이다. 여름처럼 싱싱하고 뜨겁던 나의 열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방전된 여자예요."

회식을 마치고 2차를 가자는 자리에서 밀고 당기며 여자가 어떻게 전기가 안 통하느냐는 농에 얼결에 한 말이다. 나는 전기가 안 통하는, 배터리가 방전된 여자라는 엉뚱한 대답에 모두 배를 쥐고 웃었다.

그 말을 하고보니 나도 어느새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가 되었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워졌으며 남자 또는 여자라는 편견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여자로서의 기능과 아름다움의 상실감보다는 여자라는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더 좋다. 친구들은 내 말에 이해가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여자로서 신이 주신 인생의 두 번째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행복하다.

이제 잘난 사람보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서로 이해하고 걱정해 주며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남·여 불문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 비나 눈 오는 날을 좋아하며, 잘 울고 잘 웃을 줄 아는 사람, 작은 일에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 마음이 따듯한 사람, 그런 사람들과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의 배터리는 외부로 흘러 나가기만 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아이들의 앞길에 안개등을 켜고 늘 바라봐야 했다. 바깥일에 최우선을 두는 것이 남자로서의 당연한 일이고, 가정일은 여자의 소관이라는 생각으로 귀가시간이 늘 늦어지는 남편을 위하여 등 하나쯤은 켜 두어야만 안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밝은 빛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나의 배터리의 전류는 분주히 흐르게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배터리의수명은 다했나 보다.

나의 삶에 충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기억력은 감퇴되고 순발력은 떨어지고 있다. 돋보기가 아니면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사회에 한 박자씩 늦게 대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사람들이 말한 다. "무슨 걱정이야 방전됐으면 충전시키면 되지." 하고 말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방전된 내 삶에 전류를 흘려보내 충전시키는 일이다. 그 배터리는 남편의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 아이들이 나에게 보이는 작은 관심과 사랑, 친구들의 격려와 정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남은 내 생을 밝힐 배터리는 다시 충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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