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쥐 사랑
고양이의 쥐 사랑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0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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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이 수 한 <청원군노인복지관 관장·신부>

지난 주일 아주 아름다운 신랑과 신부의 혼인 예식을 거행했다. 특히 신랑은 축가를 듣고 나서는 손수 드럼을 치며 신부와 하객들에게 '넌 내게 반했어'라는 신나는 노래를 선물했다. 정말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죽음으로 갈리는 순간까지 간직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필자는 신분이 성직자이기에 3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수백쌍의 혼인 예식을 주례해 왔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혼인 예식의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임을 늘 강조하곤 한다. 혼인이라는 것은 결혼식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갈리는 순간까지 두 사람이 거행해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천주교회에서 하는 결혼식은 너무 길어 힘들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필자는 정말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혼인이라는 것이 평생의 삶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면 혼인 예식은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사실 예식장에서 보는 신랑 신부의 모습은 항상 아름답다. 그러나 결혼해서 살아가는 부부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 다 신랑 신부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결혼 예식을 시작으로 보지 않고 마침으로 보는데 있지 않은가 싶다. 즉 결혼 전에는 상대 중심의 진정한 사랑을 하다가 결혼 예식과 더불어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회귀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연애할 때는 당신 없이는 못 산다고 하다가도 결혼하고 나면 당신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사랑이란 결코 상대중심이지 자기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상대에 대한 배려는 부부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원만해지기 위해서는 남에 대한 배려가 선행돼야만 한다.

이기적인 사랑이나 욕망은 단지 사랑처럼 보일 뿐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사랑은 고양이가 쥐를 사랑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고양이처럼 쥐를 좋아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있어서 쥐는 단지 놀이감이나 먹이의 대상일 뿐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만일 고양이가 쥐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속삭인다 하자. 쥐에게 있어서 이 고양이의 속삭임은 달콤함이 아니라 소름끼치는 끔찍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따라서 고양이의 쥐 사랑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고양이가 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쥐가 고양이의 먹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의 선진화란 명목으로 요즈음 펼쳐지는 사회복지 관련 정책들이 고양이의 쥐 사랑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선심성 강한 기초노령연금이나 3% 노인만을 위한 장기요양보험의 여러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고, 쥐꼬리만 한 급여의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임시방편적인 출산장려정책이나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원 역시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사회복지 정책만큼은 고양이의 쥐 사랑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대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실행돼야 한다. 즉 정부의 입장이 아니라 국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복지정책이라야만 하겠다. 효용의 극대화라는 시장논리만으로는 진정한 복지국가 건설이 불가능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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