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무내서 괴산댐으로
<13> 가무내서 괴산댐으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06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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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
◈ 괴산댐 최상류 전경 괴산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확인할 길이 없다.
괴산댐에 묻힌 옛절경 반세기 만에 모습

'雲霞洞門' 암각 문귀 최초 확인 개가
거치비 마을 유래된 우암 글씨 물밑에

김 성 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이 상 덕 기자


달래강 물길 3백리 가운데 물흐름이 '노루 모가지' 형국을 한 곳은 무척 많다. 하지만 마을 이름이나 지명으로서의 노루목으로 불리는 곳은 괴산군 청천면의 노루목과 충주시 살미면의 노루목 뿐이다. 이들 두 곳의 지형은 모두 물줄기가 노루목처럼 휘돌아 흐른다는 공통점 외에도 물살이 비교적 센 여울을 이루며 굽이친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윗 노루목, 즉 청천면 관내의 노루목을 빠른 물살로 줄행랑 치듯 휘돌아 나온 물길은 예전 '덕평 유원지'라 불리던 거봉리 앞 강변에서 잊혀졌던 옛추억을 되새기며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이곳 덕평 유원지는 지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청주 등 인근에서 물놀이를 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항시 북적였으나 지금은 화양구곡과 선유구곡, 청천 뒤뜰숲 등 숲과 그늘이 있는 곳으로 손님(?)을 빼앗겨 점차 퇴색해 가는 옛명소로 변해 버렸다.

거봉리서 추억을 털고 일어선 물길은 다시 거봉교를 지나 덕평에서 지촌을 잇는 덕평1교를 향해 푸른 비단을 곱게 펼친다. 조금 전의 지루하던 곧은 물길과는 딴판이다. 거봉교서 덕평1교 방면으로 절벽을 끼고 굽이치는 달래강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거봉교 아래 절벽밑으로는 자라들이 햇볕을 쐬느라 자주 출몰하던 자라바위들이 빼곰히 머리를 들고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연산 자라를 잡기 위한 싹쓸이식 남획이 성행하면서 지금은 예전처럼 많이 올라오질 않는다고 한다.
◈ 달래강의 겨울풍경과 운하동문 글귀 괴산댐 최상류 운교리 부근의 겨울풍경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원내는 취재팀이 최초로 찾아낸 '운하동문' 암각글자로 사진의 물굽이 친 절벽 부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거봉교와 덕평1교는 이 근처에서 가장 높게 세워진 신설교로서 높은 다릿발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이들 다리가 건설될 당시인 2000년을 전후해 가칭 '달천댐'이 새로 들어선다느니, 기존 괴산댐을 확대 증설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돈 이후 걸핏하면 댐 건설 얘기가 들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호사가들은 높게 세워진 이들 다릿발을 증거물인 양 들먹이며 마치 사실처럼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덕평1교가 세워진 양쪽 강변으로는 새마을운동이 물결치던 지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나룻배가 있어 덕평리와 지촌, 사기막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먼 이야기'가 됐다.

거봉교서 덕평1교 사이의 구간은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하류쪽 괴산댐의 영향으로 수위가 올라가는 사실상의 댐 상류에 속한다. 따라서 이 구간부터 최소한 댐 직하부(괴산군 칠성면 외사·송동리)까지는 괴산댐 건설로 인해 나타난 각종 영향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괴산댐은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의 전신)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지난 1952년 착공, 5년만인 1957년 준공한 댐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순수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조사,계획,설계,시공된 최초의 발전 전용댐이다. 지금은 괴산댐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지만 예전엔 수전댐, 칠성댐, 외사댐 등으로도 불렸으며 댐내 호수, 즉 괴산호는 괴산군 칠성면과 문광면, 청천면 등 3개 면에 걸쳐 있다.

댐의 유역면적은 671㎡, 총저수용량은 1,500만톤으로 댐 치고는 많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 안에는 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연하구곡'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옛 계곡들이 수많은 문화유적과 함께 물에 잠겨있으며 댐 조성에 따른 생태변화 등 자연환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달래강의 숨결' 취재팀은 댐 건설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댐내 잊혀졌던 구곡들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생태계에 나타난 각종 변화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댐유역을 현지 취재했다.
'거차비 동문'의 존재를 증언해 준 박래성씨

취재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의 동쪽 절벽으로, 이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는 곳이다. 취재팀이 다른 곳을 재켜두고 이곳을 먼저 찾은 이유는 인근에 있는 지촌리의 '거치비' 마을 이름이 이 글귀의 '거차비'에서 유래됐을 만큼 상징성과 역사성이 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암 선생이 '가히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바위에 글자까지 새겨가며 감탄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옛명소였기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지 어부의 도움으로 배까지 빌려타고 찾아간 취재팀은 이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암각된 글자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현지 주민인 박래성씨(81)로부터 "물속에 잠겨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더욱이 아쉬움을 더한 것은 '동문(洞門-물가의 절경 혹은 경승지의 입구란 의미로서 특히 구곡과 같은 연이은 절경의 첫 번째 절경에 흔히 붙임)'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증언으로 보아 예전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빼어난 절경이 강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이렇다할 절경이 남아있지 않아 상전벽해의 무상함을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두 번째로 찾아간 운교리앞 절벽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다만 이곳 절벽에서는 배를 빌려준 여영희씨(현지어부·운강식당 운영)의 도움으로 향토사학자들도 모르는 '운하동문(雲霞洞門)'이라고 암각된 네 글자를 최초 확인하는 보람을 얻었지만, 이 일대 역시 댐 조성후 변해진 물길로 옛정취는 찾아볼 수 없고 현대적인 댐 풍경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하동문 글귀가 암각된 산자락을 끼고 운교리앞을 벗어날 즈음 수십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이 그 옛날 운하구곡의 마지막 절경으로 추정되는 사모바위다. 바위절벽 위에 마치 눈사람의 머리처럼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 운하구곡의 사모바위바위절벽 위에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사모바위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원내가 훼손된 사모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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