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향기
저녁 향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06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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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조 영 의  <수필가>

베란다에 분꽃이 피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분꽃을 보고 저녁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집에 핀 꽃을 보면 저녁을 짓기는 이른 시간이다. 고층 아파트 베란다니 다를 수 있겠지 생각하며 바라본다

꽃도 작다. 어떤 날은 두어 개 피었다가 지고 다붓다붓 피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저녁 향기에 취해 보는 시간을 기다리며 즐긴다.

분꽃이 있던 자리에는 연꽃이 있었다. 우연한 자리에서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연꽃을 피울 수 있다고 들었다. 순간 콩 튀듯 달려가 사왔다. 그러나 잎만 무성할 뿐 꽃대는 올라오지 않았다. 지루하고 답답한 여름이 갔다. 가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얇은 내 귀를 탓하며 구석으로 밀어 버렸다.

봄이 되었다. 무심코 화분을 보니 연꽃이 자라고 있었다. 바늘귀에 꽂아도 될 듯한 줄기는 바라보는 내가 더 힘겨웠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생각 끝에 단독주택에 사는 지인에게 주기로 했다.

그날부터 내 마음은 연꽃이 있는 그 집 뜰에 가 있었다. 가끔 잘 자란다고 들었지만 내 조급한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직접 찾아가 보고 확인해야 마음 편히 돌아설 수 있었고 그곳에 있을 뿐 마음은 늘 내 것이었다.

어느 날 연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왔다. 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연꽃이 핀다고 알려준 사람. 꽃이 필 거라며 판 사람. 같이 동행하여 골라준 사람. 피지 않는 연꽃을 보면서 많은 시간 미워했었다. 그러면서도 연꽃을 관리하지 못한 나를 돌아보지 못했다.

비 오는 날이다. 절에 갔다. 비가 세차게 내렸기에 법당 추녀 끝에 서 있었다. 낙숫물이 비비추 위로 떨어졌다. 낯선 소리였지만 맑고 경쾌하여 듣기 좋았다.

때마침 지나가다 만난 주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비비추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로만 기울였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비비추가 아파하는 소리라고 하셨다.

장마가 끝나면 비비추 잎은 모두 갈라져 있다고 한다. 낙숫물이 떨어질 때마다 줄기가 찢기는 아픔의 소리인데도 듣기 좋으니 이 또한 업이지요, 한다. 스님 말씀이 울림이 되어 합장을 하고 돌아서는데 왠지 미워졌다. 아파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면 비비추를 옮겨주면 되지. 추녀 밑에 심어놓은 그 또한 업이 아닌가. 낙숫물 소리를 놓쳤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비에 젖고 있는 비비추가 생각난 것은 모를 일이다. 자신의 속살을 찢는 아픔을 몰라주는 일이 추녀 밑 비비추뿐일까.

어떤 색깔의 꽃일까. 연꽃을 보러가기 전에 내 마음의 정리도 필요했다.

저녁 바람이 상깃하다. 분꽃 위로 햇살이 노닌다. 기다리는 꽃봉오리를 위하여 아파트 마당에 심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도 혼자 느끼는 저녁 향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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