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짓밟아라! 그러면…
그래 짓밟아라! 그러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7.0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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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급기야 촛불시위 현장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쫒기고 쫒으면서 얻어터지고 짓밟히는가 하면, 어린애와 연약한 부녀자들까지 마구잡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폭력을 놓고 시위대가 먼저냐 경찰이 먼저냐의 공방은 의미가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극악무도한 패륜적 폭력이 난무하고 있고, 이 폭력은 언젠간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 서울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6월 항쟁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이후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살벌함을 띤다. 공-방 당사자의 선혈이 낭자한 모습은 이미 국민들에게 익숙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아주 잔인한 것 외의 보편적 폭력엔 아예 무감각하던 20년 전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의 현대사에서 80년대만큼 집중적으로 폭력이 넘쳐났던 시대도 없다. 정권탈취와 이의 유지를 위한 국가권력의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그것에 항거하거나 아예 물리치려는 '저항의 폭력'까지, 결국 폭력이 폭력을 잉태하는 시절을 우리는 피로써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런데 똑같은 현실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폭력은 단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유형의 폭력도 반드시 명분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제어가 안되면 반복되거나 오히려 확대된다.

이 점에 대해선 한가지 고전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폭력은 항상 정당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폭력의 확대는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폭력은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추구 때문에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치의 피해자로 평생 사회악과 폭력의 본질에 천착하며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쏟아냈던 그녀의 경고는 고스란히 수십년 동안 대한민국을 짓눌렀다.

분단 체제에서 과거 독재권력이 국가안보 내지 안위를 내세워 자행한 폭력은 늘 정당한 공권력으로 포장됐다. 혹간 그것이 폭력으로 규정되는 순간에도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부당·불법에 대한 합법적 폭력으로 미화됐다. 바로 폭력의 정당화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다.

촛불집회에 대한 공안 당국의 강경진압에 앞서 정부가 여론화한 것은 국가 안위에 대한 불안의식의 강조였고 수구언론이 이를 받아 나팔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폭력의 한 형태는 다른 형태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서로간 모방과 상승과정을 거쳐 더 진화하거나 악화될 수밖에 없고 그 정점은 결국 빅뱅이다. 87년 6월 항쟁이 대표적이다.

폭력은 결코 문제해결의 단초가 될 수 없다. 설령 강력한 공권력에 의해 시위대가 풍비박산 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결말로 끝나지는 않는다. 또 다른 변형의 저항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엔 절대 당위성을 부여하면 안된다.

이번 촛불집회가 애초 잘못된 협상으로 불거진 상황에서 그 원인자의 원천무효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국민대중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사회의 협치(協治)다. 어린아이에서부터 학생, 주부, 직장인, 농민, 스님, 신부 등 신분과 계층에 상관없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현실은 이젠 더 이상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는 과거의 이분법적 통치술로는 나라경영이 어렵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산 지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정말 국민들이 짓밟아야 하는 대상은 국회다. 여당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 충혈된 눈알만을 굴리는 승냥이가 됐고, 야당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시민들을 배경으로 추악하게 표정관리만 하고 있다. 이렇게 대의민주주의가 죽어 나자빠진다면 국민들은 또 다시 피를 흘리며 직접 민주주의를 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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