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와 소
컨테이너와 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2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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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이유 없이 막아서는 / 어둠보다 딱한 것은 없다. / 피는 혈관에서 궤도를 잃고 / 사람들의 눈은 돌이 된다.'라는 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한 꽃의 시인 김춘수의 '유월에'의 한 부분이다.

기가 막힌다.

수많은 밤과 수많은 개체들의 집합으로 간절히, 간절하게 소통을 원했던 촛불의 '아고라(광장)'는 컨테이너, 그 이동의 장치에 막혀 좌절한다.

국민은 말하려 하고 있고 또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다시 거리와 광장으로 나와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세상이 거북스러운 것은 보통사람의 보통생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손을 잡고 나오거나, 자식들이 부끄러워 나오거나 하는 미래지향성을 헤아려야 한다.

수출이 많음을 긍지로 삼아야 할 대한민국의 컨테이너가 졸지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가로막는 광화문에서, 지금 부산항에 그리고 인천항 땅바닥에 주저앉은 컨테이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희망은 무엇인가.

컨테이너, 그 흐름과 유통의 상징이 철옹성으로 변모하는 그 기막힌 문화적 역발상이 조건없이 이동을 최선의 미덕으로 여겨야 할 컨테이너에게 주저앉음을 용납하는 빌미를 준 것은 아닌지, 치솟는 기름값 그 살 떨리는 현실에서도 품게되는 참으로 기가 막힌 생각이다.

촛불의 배후는 '소'라는 말도 있다. 그 '소'의 배후는 30개월이고 또 그 배후는 먹는 일이며 결국 인간의 욕망이다.

'소'를 그리던 화가 이유중은 요즘 소나무를 그린다.

인간에 의해 겨우 30개월 미만으로 재단되는 소의 생명이 억울해서일까.

아니면 근 20년 가까이 사람보다 소중한 대접을 받았던 식구같고 가족같던 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논 갈고 밭 갈던 노동의 가치 대신 맛있는 쇠고기로만 연상되는 '소'의 애환이 서러워 화가 이유중은 더 이상 소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갈수록 풍요롭게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오래오래, 더 건강하고 윤택하게를 갈구하는 욕망의 끝없음을 추구하는 사이 '소'에 대한 애틋한 근본은 사라지고 그리하여 그 추억도 삭아가고 있다.

다시 김춘수,

'이유 없이 막아서는 / 어둠보다 딱한 것은 없다'는 유월.

현충일 사이렌은 어김없이 울리고 '국군은 죽어서도 말한다'거나 '녹슨 철모'는 유산처럼 기억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소'의 진솔함은 외면한다.

많은 국민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거리로 나오고 있고 경찰은 막아서는 일의 피곤함을 컨테이너 철옹성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동과 소통, 흐름으로 이어지는 일이 본질인 컨테이너는 말을 막고, 생각을 막고, 소통마저 막아버리는 문화적 병리의 새로운 상징이 될까 두렵다.

사람에 의해 겨우 30개월로 재단되는 소의 생명, 그 시한부 우생(牛生)이 치욕적일 수밖에 없는 '소'는 제 먹거리를 위해 할 일 못하게 하고, 못 먹을 것 먹이는 인간에게 미쳐감으로 반항하고 있다.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수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 두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고개 넘어 세포 검불령

길은 끝없이 서울로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못 오네.

'이광수·서울로 간다는 소·부분' 로 노래된 못 오는 '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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