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18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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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오 소 희 <회사원>

유월이 아름다운 것은 장미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동네 골목길 울타리에 피어 있는 장미꽃은 아침을 활기차게 하고, 관공서 담장에 늘어진 장미꽃은 권위와 삭막함을 덜어 줍니다. 출근길 회색빛 도시에 피어 있는 갖가지 빛깔의 장미꽃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충만함이 치밀어 오릅니다.

이런 상태를 평화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상태, 무엇인가 충만하여 너그러워지는 상태. 이럴 땐 세상을, 이웃을, 미움을 다 품어 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선들바람이 불어 오는 유월의 저녁나절은 사랑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공원에 나온 손자의 웃음과, 친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젊은이의 대화 속엔 생명력이 넘쳐납니다. 모처럼 아내와 산책 나온 중년의 남편은 휴식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유월을 우리 모두가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다, 등대, 파도, 어선, 바람이 있어 어부가 행복하듯이 비록 사는 일이 힘겨워도 서로의 미소로 인해 가슴이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왜 그 행복을 빼앗아 갔습니까. 왜 그 소중한 밤 촛불을 켜게 했습니까.

며칠 전 일이 있어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시위대와 마주쳤습니다.

"광우병 소 수입반대"

피켓을 들고 말없이 행진하는 그들을 외면한 채 숙소로 향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내 손을 잡아끌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과 안면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집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편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믿기에 좀 기다려주자는 편입니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촛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 가여웠기 때문입니다.

유월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초상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안타까움은 미얀마 어린이들이 태풍으로 부모와 재산을 잃고 몸부림치는 아픔과, 중국 쓰촨성 지진 속의 신음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제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이며 배려와 절제가 무엇인지 행복과 자유가 무엇인지 막 느끼려는 우리들의 마음에 또다시 대못이 박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한말 쇄국정책을, 일제의 식민지를, 동족상잔의 6·25를, 유신을, 구제금융 사태를 이겨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린 우리 앞에 취업대란이 놓여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짐을 지기에도 벅찬데 그 위에 또 다른 짐을 얹어주면 어찌 일어서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서러웠습니다. 물대포와 구둣발보다 그것이 더 서러웠습니다.

종로경찰서 앞 시위현장은 딴 세상이었습니다. 내가 아침마다 보는 유월의 장미꽃과 아침이슬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기도 자꾸 걸리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가뭄이 오래가면 땅이 갈라지고, 장마가 길어지면 뿌리까지 썩습니다.

이제 모두 제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소망은 재벌도 아니고, 중역도 아니고 거상도 아닙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잘살아보세'를 외치던 때는 돈이 목표였지만 우리의 정서와 목표는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돈이 전부가 된 세상에서는 경제가 많은 것의 절대기준이 되었고, 사람의 높낮이도 재산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그것이 피부 빛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태까지 불러왔으니 어찌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충만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월의 바람에 감격하고 장미꽃 같은 사랑을 하고 유월의 들판처럼 평화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무리한 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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