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책
촛불의 책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1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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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박 을 석 <초등위원장 전교조 충북지부>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불의 생성은 모든 생성 가운데서 가장 극적이며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불에서 그것을 상상한다면 세계의 걸음은 빠르다. 그리하여 철학자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는 모든 것을 폭력이나 평화까지도 꿈꿀 수 있는 것이다."(촛불의 미학 중에서)

20여년도 더 전에 뒤적거렸던 프랑스 철학자 가스똥 바슐라르의 책이 생각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불사르고 있는 촛불집회의 장엄함 때문이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하고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이며 현대적이면서도 미래적이고, 세상을 향하면서도 자신을 응시하는 촛불, 촛불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뜨겁게 타오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민중의 촛불들 때문이다.

가스똥 바슐라르는 인류에게 나타난 불을 몇 가지로 유형화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훔쳐다 인간에게 안겨줌으로써 비로소 인간문명을 열게 되는 생성으로서의 불.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소진과 소멸, 파괴로서의 불. 우리가 뜨겁게 사랑할 때, 서로를 갈급할 때 가슴에, 온몸에 타오르는 사랑과 정염의 불. 네 번째로 형상은 물이면서 속성은 불인 술. 그리고 촛불.

그가 말한 촛불의 정확한 유형적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안타깝게도 지금 내 옆에는 그의 책이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가 썼던 몇구절의 글귀가 있을 뿐. 그러나 책이 없으면 또 어떠랴. 요즈음 대한민국의 모습은 거대한 촛불의 책이니 말이다.

촛불을 삼키려는 물대포에 맞서 '이왕이면 온수를 달라', 이미 흠뻑 젖었으니 '씻기라도 하게 샴푸도 달라'는 통쾌한 웃음이 있다. 개인적인 글쓰기에서 비롯된 작은 동아리들의 실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바로 세우는 행렬이 있다. 나라를 바로 잡으려 하면서도 저마다 어떻게 참여하고 함께 할 것인가 고민하는 밤이 있다. 광우병 소에 맞서 건강한 미래사회를 꿈꾸는 집단적 희망이 있다. 촌지금지 지침을 없앤 장관이 나랏돈으로 제 자식 학교에 촌지를 가져다주는 등등의 미친 교육에 대한 대거리가 있다. 공공의 재산(물, 전기, 에너지 등)을 사유화하려는 불순한 기도에 반대하는 투쟁이 있다.

미래는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우리의 미래이며, 그러한 미래여야 한다는 견고한 믿음이 있다.

사회현실이 곧 자신의 현실이라며 나선 아이들과 어머니와 교사와 시민들의 실존적 만남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담긴 책을 나는 한 달 동안 보고 또 보았다. 몇번인가는 손끝에 촛불도 태웠다.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촛불의 책과 함께 나는 낮과 밤을 지냈다. 두고두고 읽어도 그 뜻을 다 읽지 못할 책과 함께.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어쩔 수 없는 한계 탓인지 어떤 외로움이 남았고 또 다른 그리움도 남았다. 밝힌 빛의 범위가 있는가 하면 미처 비추지 못한 어둠도 넓게 퍼져 있다.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의지와 불순물과 더러움 사이의 투쟁은 여전히 필요함에도 곧장 중심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그 결투장의 가장자리에 홀로 서있다.

온전히 하나가 되고픈 도도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저 나, 저 우리의 촛불은 오늘도 계속 타오르는데, 끝없이, 끝없이 타오르는데.

"촛불은 혼자 꿈꾸는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속으로 애태우면서 절망과 체념을 삼키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혼자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의 이마주와 같은 것이다. 또한 파란빛과 연결되어 있는 촛불의 흰빛은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으며 심지와 연결되어 있는 붉은빛은 모든 불순물과 더러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둘의 투쟁이 하나의 변증법을 이루면서 타는 촛불은 흰빛의 상승과 붉은빛의 하강, 즉 가치와 반가치가 싸우는 결투장인 것이다."(촛불의 미학 중에서) 촛불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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