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마를렌 디트리히
미스 마를렌 디트리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3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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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라는 사회적인 약속에 대하여 학습을 시작합니다. 언어에 대한 학습이란 소리와 의미 그리고 형상의 연결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차(車)'라는 단어를 알았다고 한다면 먼저 차를 발음할 수 있어야 '차(車)'라는 단어의 학습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차'는 소통의 도구로 쓰일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차'라고 발음할 수 있어도 용도를 모른다든지 생김새를 연결하지 못한다면 '차'에 대한 학습이 완료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는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수화라든지 표정이나 몸짓과 같이 분절되지 않은 언어도 소통을 기본적인 기능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언어를 넓은 의미의 언어라고 할 수 있지요.

문학은 이 언어를 도구로 하여 독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때로는 정확한 전달이 되지 않아서 작품과 독자 사이에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언어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컴퓨터가 소통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악의적인 언어가 검증없이 사용되고 있어서 언어의 해악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와 미스 마를렌(전혜정, 문학동네2008년 봄호)은 도심 속에서 언어의 바다에 갇힌 무인도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들머리에서 아버지의 유산이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했으나 그 유산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를렌에게도 잘못은 없다고 서술하고 있으니 죽은 그에게도 잘못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일까 슬며시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화재로 그가 죽을 무렵에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는 정도가 마중물이 되는 셈이지요.

"우리 집 앞 단층집에 사는 남자 말이야" 며칠이 지난, 저녁식사 때였다. 갈치구이를 젓가락으로 뒤적이던 아내는 말끝에 조금 웃었다. "글쎄 집안에서 소를 기른다는 거야. 그것도 암소를 말이야" 아내는 이어서 암소가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인 셈이어서 그가 몇 년 전부터인가 집 안에서 기르는 것이라는 둥, 암소를 기르기 위해 집 안을 아예 싹 뜯어고쳤다는 둥의 얘기를 제법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근데 말이야" 아내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마치 누군가가 우리의 얘기를 엿듣고 있기라도 한 듯 주위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 암소랑 망측한 짓을 한다는 거야. 그걸 목격한 사람도 있대" 아내는 은근히 자신의 얘기에 흥분한 눈치였다.

그는 암소 이름을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푸른 천사>에 나오는 마를렌 디트리히는 어떻게 하면 남자들을 단숨에 흥분시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여배우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서술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소문의 화마 속으로 밀어넣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없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폭행사건 수사를 맡게 된 계기로 피의자가 그의 손에 쥐어 준 십만 원 권 수표 두 장을 받아들면서 시작된 불운한 삶은 7년간이나 지속되었지요. 사십 초반에 찾아온 때 이른 중풍과 아내의 가출은 그 정점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산으로 잠시나마 행운의 시간들을 보내긴 하나 길지 않았으며 결국 그 유산으로 인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의 유산이 불운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면서 동시에 화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서술자인 나에게 그대로 전이됩니다. 나는 우리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언어는 이 시대에 성행하는 수많은 '카더라 통신'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모든 악의적 댓글을 그 의미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읽은 책짜오지엔민 저, 곽복선 역. 죽림칠현. 푸른역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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